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늙은 어부가 돛단배에서 홀로 4일 밤낮을 청새치와 싸운다는 줄거리야...... 카를로스 영감의 배를 타고 이 얘기가 그럴듯한 지 바다로 나가보려고 해. 다른 배는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홀로 긴 싸움을 하는 중에 그가 한 모든 행동과 생각들이 그럴듯한 지 말이야. 제대로만 해내면 정말 멋진 이야기가 될 거야, 작품이 되겠지!
- 1939년 헤밍웨이가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명작 중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노인과 바다> 일 것이다. 헤밍웨이가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이긴 하지만, 내가 읽은 그의 유일한 작품은 <노인과 바다>뿐이다. 어이없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의 작품을 단 하나만 읽은 이유는 헤밍웨이의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읽기가 쉽기 때문이었다. 짧은 분량인 데다 인물의 심리 묘사는 최대한 배제한 채 사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공대 출신 개발자들이 선호하는 작품 스타일일 것이다. 내가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고 짧은 문장으로 말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헤밍웨이의 작품이 재밌고 잘 읽히기는 하지만 나와 좀 더 동떨어진 세계를 체험하기 위해 일부러 외면해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게 된 건 작품이 산티아고 노인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작품이 주는 감동을 느끼길 원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무기력해지는 모습이 반복되자 자극이 될 수 있는 무언가를 찾고자 했고, <노인과 바다>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던 것이다.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은 84일이나 고기를 못 잡다가 마침내 바다 멀리 나가서 굉장히 큰 청새치 한 마리를 낚는다. 그는 이틀 낮밤을 꼬박 물고기와 싸운 끝에 드디어 길이가 5.5미터 가까이 되고 무게가 700킬로그램가량 되는 엄청나게 큰 물고기를 잡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배 옆에 물고기를 매달고 돌아오던 중 상어들의 연이은 공격을 받아 물고기는 뼈와 대가리만 남고, 노인은 결국 또다시 빈손과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깊은 잠에 빠져든다.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 않아."
- 산티아고 노인이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면서 한 말
주인공 산티아고는 쿠바의 아바나에서 평생을 물고기를 잡으면서 살아온 늙은 어부다. 사실상 소설에서 유일하게 등장하는 인물로, 줄거리 내내 산티아고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드러나며 독자들은 이를 통해 감동을 느낀다. 부인은 먼저 세상을 떠났고, 삶의 낙이라곤 메이저리그의 뉴욕 양키스 소식을 신문을 통해 보는 것이며, 84일 동안 물고리를 잡지 못해 하나뿐인 친구였던 소년은 다른 배를 타기 시작한 노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단 말인가. 청새치를 잡고도 상어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노인의 결과는 초라해 보일지 모르지만 그가 보여준 불굴의 의지와 자연을 대하는 태도, 소년과의 유대감을 통해 우리는 삶에서 소중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산티아고 노인은 긴 시간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했음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히 수행해 나간다. 함께 고기잡이를 나갔던 소년이 자기 곁을 떠날 수밖에 없음에도 그는 여느 때처럼 착실하게 준비를 하고 망망대해로 떠났다. 고생의 끝에 복이 있다고 했던가. 그는 거대한 청새치를 만나게 되고 이틀 동안 사투를 벌이며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청새치와 싸우는 과정에서 그는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인내하며 버틴다. 불굴의 의지를 통해 승리를 거두는 모습에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희열을 느끼고 어떤 삶의 태도를 견지하며 살아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노인이 이루어낸 과업이 상어들에 의해 송두리째 사라지는 참변을 맞게 된다. 노인은 힘에 부치는 데도 상어들과 계속해서 싸우지만 결국 그에게 남은 건 물고기 뼈밖에 없었다. 모든 걸 빼앗긴 와중에도 그는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원숙함을 보여준다. 겉으로 볼 때는 실패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노인은 패배를 모르는 인물인 것처럼 보인다. 며칠 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바다로 나가 자기가 맡은 책무를 다 하고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내가 개발자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고,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이 늘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사진과 여행도 마치 의무인 냥 심드렁한 상태로 다녔고 크게 재미있지도 않았다. 거듭되는 스트레스로 지인들과 이야기하면서 내 생각이 받아들여지길 강요한 적도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준 적도 많았던 것 같다. 산티아고 노인의 삶을 보며 일도, 취미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항상 무기력한 모습을 보인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신은 삶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준 것이고, 삶에 대해 감사하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 해 살아가야 할 책무가 있다. 결과야 어떻든 간에 긍정적인 태도와 굳은 의지를 가지고 산다면 멋진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행운은 기다리는 자에게 찾아오지 않는다고 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인내와 용기를 가지고 사는 노인이 영웅처럼 느껴졌다.
이젠 집까지 그리 멀지 않을 거야, 노인은 생각했다. 나를 크게 걱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좋겠는데. 물론 걱정할 사람은 그 애밖에 없겠지만. 하지만 그 앤 틀림없이 날 믿고 있을 거야. 그래도 나이 든 어부들 중엔 걱정하는 사람들이 꽤 있겠지. 다른 사람들 역시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거야, 노인은 생각했다. 난 좋은 마을에 살고 있어.
- 상어와 싸움에서 패배한 뒤 집으로 돌아가면서 노인이 한 말
<노인과 바다>의 중심 주제는 패배를 모르는 노인이 보여주는 불굴의 의지다. 하지만 노인의 독백에서 느껴지는 소년과의 유대감을 통해 독자는 또 다른 감동을 느낀다. 노인은 낚시하는 도중에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소년 때문이라고 말하며 소년의 빈자리를 보며 아쉬움을 느낀다. 소년은 아침마다 노인을 찾아와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고, 노인이 돌아온 뒤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아무리 마음이 굳세고 강한 사람이라도 유대감을 느낄 수 있고 서로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삶을 살아갈 의지를 잃어버릴 위험성이 크다. 그런 면에서 난 산티아고 노인이 정말 부럽다.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타지에서 살아가는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대할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노인이 가진 삶의 철학이야 내가 노력해서 배우면 되는 것이지만, 소년과 같은 진정한 벗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깊은 속내까지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친동생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로가 될 뿐이다.
헤밍웨이는 1899년 7월 21일 미국 일리노이 주 오크파크에서 태어났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구급차 운전병으로 참전했지만, 큰 부상을 입고 이듬해 귀국했다. 1921년에 해외 특파원으로 파리에 갔으며, 파리에 체류하는 동안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유명 작가들과 교류할 기회를 가졌다. 1923년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헤밍웨이는 1926년에 <태양은 다시 뜬다>라는 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29년 <무기여 잘 있거라>, 1936년 <킬리만자로의 눈>, 1940년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차례로 발표하여 큰 사랑을 얻었다. 1952년에 발표한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 최고의 역작으로, 그는 이후 이 작품을 바탕으로 1953년에 퓰리쳐상, 195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후 글이 잘 써지지 않게 되자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1962년에 엽총으로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헤밍웨이는 '마초'로 대표되는 이미지로 한 평생을 살아온 작가다. 짧고 간결하게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문체와 강렬한 이미지의 남자 주인공을 보면 알 수 있다. 헤밍웨이가 산티아고 노인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제로 격렬한 운동과 야외 활동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는 쿠바에 거주하면서 낚시를 즐겼고 어부들의 삶을 경험하면서 그들의 고된 모습을 수없이 지켜보았다.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작품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다른 작가들이 직접 경험하기 힘든 인물들의 삶을 겪었던 경험이 밑바탕에 있었던 것이다.
헤밍웨이는 부유한 삶을 살았음에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네 번째 부인인 메리가 곁에 있었음에도 글이 제대로 써지지 않는다는 고민으로 시간을 보냈고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산티아고 노인이 계속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몸이 허락하는 한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작가로 살아가는 자신이 더 이상 글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헤밍웨이의 강렬했던 삶이 이해가 된다. 고난과 역경이 있을지언정 내가 그것을 극복할 능력을 발휘할 여지조차 없어진다면 삶을 살아갈 가치가 있을까. '소년'과 같은 존재인 메리가 곁에 있었음에도 헤밍웨이는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쿠바는 오랫동안 미국의 제재 속에서 방문하기 어려운 나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카리브해의 조그만 섬나라가 개방을 시작하자 지금껏 베일에 싸였던 쿠바의 아름다움이 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바나의 잘 보존된 구 시가와 도로를 배회하는 빈티지 자동차들을 비롯해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으로 대표되는 재즈 음악까지... 쿠바에 가고 싶은 이유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쿠바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헤밍웨이가 살던 아바나가 있다는 것이고, 아바나에 가면 헤밍웨이가 살아온 삶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쿠바에 가고 싶다. 지금은 해변에 산티아고 노인이 타던 배 대신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만 <노인과 바다>만 있다면 헤밍웨이가 보았던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질 것만 같다.
출처
2) https://theculturetrip.com/caribbean/cuba/articles/top-7-places-for-ernest-hemingway-fans-in-cuba/
3) http://www.royalcaribbean.com/connect/tips-for-traveling-to-cuba/
4) https://www.mydesignerrug.com/products/guy-harvey-old-man-and-the-sea-rug
5) https://sindarfrom.wordpress.com/2014/03/26/the-old-man-and-the-sea/
다음 독서 노트 - 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