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계획없이 제주로 향했다. 친구들의 부름에 못이기는 척 함께 하겠다고 했지만, 나에게도 한 가지 제주에서 이루고 싶은 계획이 있었다. 함덕 해안가를 따라 달리는 일.
느긋이 주말을 맞이하느라 겨우 비행기 시간에 맞추어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연착을 거듭한 덕에 일곱시가 되어서야 제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곧이어 렌트카 사무실에 들어서서는 지갑에 운전면허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한참을 헤메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와 겨우 몸을 누일 때 시간은 새벽 한 시를 넘었다.
고단한 첫 날이었다.
아침 7시, 미리 맞추어둔 알람에 눈을 떴고 그제서야 숙소가 함덕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곳이란 걸 깨달았다. 커튼 사이로 비치는 민트 빛 바다가 잠을 깨웠다. '시월의 바다가 이렇게 아름답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때 홀리듯 옷을 갈아입고, 밤새 뜬 머리에 물을 묻히고 러닝화를 꺼내 신었다.
그 순간 달리기는 어제의 고단함이 오늘의 설레임으로 바뀌는 하나의 장치 같은 것이었다.
시월 말 함덕의 바닷 바람은 매섭게도 나의 몸을 뒤로 밀어냈다. 해안을 따라 펼쳐진 경사길은 길게도 이어졌다. 너무도 지치는 러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한 거리를 의지로 완주했다. 달리는 내내 펼쳐진 함덕 해안의 파노라마가 나의 마음을 다독여주었고, 마치 42KM를 달린 것 처럼 기뻤다.
내가 달리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상황에 제약이 적고, 오직 페이스(km당 분속)와 기록으로 나의 '자기 의지'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독에 몸이 무거운 날에는 다소 느린 페이스와 기록이 남더라도 목표한 만큼 달렸다는 것에 대한 '자기 의지'를 성취로 느낄 수 있고, 몸이 가벼운 날에는 빠른 페이스를 오래 유지하며 '자기 의지'의 한계를 체험하게 된다.
매 순간 '자기 의지'를 확인하기에는 삶은 너무도 쉽지가 않지만, 달리는 순간만큼은 나의 '자기 의지'만큼 성취로 돌아오는 것이다.
느리지만 의지롭게 달린 날과 빠른 페이스를 유지하며 만족할 만한 기록을 남긴 날의 성취감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 꾸준히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낭만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