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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재 Feb 15. 2016

분노의 우유

화폐 부족으로 나온 현물 임금 

노동자의 선택권을 크게 침해  

사용자의 독점적 시장 지배로

임금 축소 수단으로 활용 우려


유럽은 16세기들어 돈벼락을 맞았다. 포르투갈의 엔히크 왕자가 서(西)아프리카항로를 개척하자마자 독일의 작센과 오스트리아의 티롤에서 대규모 은광이 발견됐다. 


노다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피사로(Pizarro)는 1530년잉카제국을 점령했다. 피사로는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잉카인들로부터 6톤의황금과 12톤의 은(銀)을 긁어모았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행운은 계속 이어졌다. 이들은 마침내 엘도라도를 발견했다. 볼리비아의 포토시(Potosi)에서 ‘세로 리코(CerroRico)’를 찾아냈다. 세로 리코는 스페인어로 ‘부(富)의 언덕’이라는 뜻이다.세로 리코에는 막대한 양의 은(銀)이 매장돼있었다. 


스페인은 대대적인 은광 개발에 착수했다. 200여 년 동안 포토시에서 4만5000톤의은을 캐냈다. 포토시는 주로 은화(銀貨)나 은괴(銀塊)를 만들어 스페인으로 보냈다. 스페인 사람들은 아직도 엄청난재산을 표현할 때 “포토시만큼 값지다(Valer un potosi)”라고말한다. 


막대한 양의 은괴는 유럽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상당량이 인도와 중국으로 빠져나갔다. 중국은 엄청난 규모의 은이유입되는 바람에 지폐 사용을 중단했을 정도였다. 


16세기 말 중국의 은 수입량은 한 해 평균 50톤으로 중국전체 수요의 90%를 차지했다. 17세기 초에는 연간 은수입 규모가 116톤으로 늘어났다. 중국은 유럽에 막대한양의 비단, 차(茶), 도자기를수출한 대가로 은을 받았다. 


대규모로 은이 유출되자 유럽 국가들은 은화 발행을 중단했다. 평범한 백성들은 은화를 손에 쥐어보지도 못했다. 서민들은 은을 구하지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영국의 튜더왕조는 세금을 은화를 비롯한 금속화폐로만 받았다. 그래서 은쟁반을 녹여 은화로 만드는 일도 자주 벌어졌다. 


일상적인 거래는 약속어음을 활용하거나 외상에 의존했다. 장부에 외상 금액을 기록했다가 일정 시점이 지난 후 한꺼번에 정산했다. 일부에서는가죽이나 납을 금속화폐 대신 사용하기도 했다. 


통화 부족은 임금 체불로 이어졌다. 통화량 부족으로 1년 이상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였다. 노동자들은 임금 대신 작업장에서 자신이 만든 제품이나 원자재를 들고나갔다. 


민간기업은 물론 공공부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영국 정부는 국영 뎃퍼드(Deptford) 조선소 노동자의 임금을 1년 이상 체불했다. 그 대신 노동자들이 조선소에서 밧줄, 못, 돛 등을 빼내 팔아먹는 것을 묵인했다.  


이 같은 임금 지급 방식을 ‘현물임금제(Truck System)’라고 한다. 처음에는 사용자가 줄 돈이 없어서 현물을 임금 대신 지급했다. 하지만시간이 흐르면서 사용자들은 노동자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사용자들이 노동자들에게 그 지역 상점에서만 통용될 수 있는 상품권을 임금 대신 지급하는경우가 많았다. 사용자가 이런 상점을 직접 운영하거나, 자신의친인척에게 맡겼다. 


숱한 노동자들이 현물 임금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미국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은 ‘분노의 포도’에서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주인공 톰 조드의 가족 일곱 명은 하루 종일 허리가 부러지도록과일을 딴다. 하지만 하루치 임금으로는 한 끼 식사조차 장만하기 어렵다. 농장 직영 상점에서 식료품을 터무니 없을 정도로 비싸게 팔기 때문이다.      


한 우유회사가 직원들에게 월급 가운데 일부를 현금 대신우유로 지급한 사실이 드러났다. 현행 근로기준법에 따르면 임금은 전액 현금으로 노동자에게 직접 정기적으로지급해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현물임금제를 금지했다. 현물 임금은 노동자의 실질 임금 축소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노동자는현물로는 자신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제약을 받는다. 


더욱이 사용자가 현물을 독점적으로 공급하기 때문에 상품가격 인하 경쟁은 원천적으로 차단된다. 경쟁 시장에서 보다 싸게 구매할 수 있는 제품을 공급자가 독점한시장에서 비싸게 구매할 수 밖에 없다. 


우유회사는 자발적인 소비 촉진 차원에서 월급 대신 우유와유제품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분노의 포도’는 있을지몰라도 ‘분노의 우유’는 없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1)   Graeber,David. 2011. Debt : The First 5,000 Years. New York : Melvillehouse. 

2)   니얼 퍼거슨 지음. 김선영 옮김. 2010. 금융의 지배. 민음사 존 스타인벡지음. 김승욱 옮김. 2008년. 분노의 포도.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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