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 두하부터 베리보르스트까지, 인류를 하나로 묶은 맛
"순대 좋아하시나요?"
이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 머릿속에 스치는 풍경은 꽤 선명합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분식집 찜통, 슥슥 썰어낸 투박한 간과 허파, 그리고 취향에 따라 갈리는 소금과 초장의 논쟁까지. 돼지 창자에 선지와 채소를 채워 넣은 순대는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고 정겨운, 그야말로 '소울푸드'입니다.
그런데 상상해 보셨나요? 한반도에서 무려 7,000km가 넘게 떨어진 북유럽의 낯선 땅, 에스토니아의 식탁 위에도 우리와 똑 닮은 순대가 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는 에스토니아의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그들의 집안은 지글지글 익어가는 고소한 소시지 향기로 가득 찹니다. 이름은 생소한 ‘베리보르스트(Verivorst)’. 하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우리네 '피순대'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검붉은 선지로 속을 채우고, 곡물을 넣어 든든함을 더한 이 요리를 보며 저는 기분 좋은 전율을 느꼈습니다. 세상 끝과 끝에 살고 있는 우리가, 사실은 같은 맛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는 반가움이었죠.
도대체 순대는 어떻게 이토록 먼 길을 건너 각기 다른 이름으로 우리 곁에 남게 된 걸까요? 오늘은 우리 식탁 위 순대 한 접시에서 시작해, 에스토니아의 눈 덮인 마을까지 이어지는 맛의 평행이론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순대'라는 단어의 뿌리를 찾아가면 뜻밖에도 낯선 만주어와 마주하게 됩니다. 1800년대 후반의 요리책 《시의전서》에는 ‘슌다ᆡ’라는 표기가 최초로 등장하는데, 이는 만주어로 피를 뜻하는 ‘성기(senggi)’와 창자를 뜻하는 ‘두하(duha)’가 합쳐진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생명의 근원인 '피'를 '창자'에 담았다는 그 직관적인 이름이 세월을 거치며 우리 식탁 위에 ‘순대’라는 정겨운 이름으로 정착한 것이죠.
그렇다면 이 요리는 언제부터 우리 곁에 있었을까요? 가장 유력한 가설 중 하나는 고려 말기, 대륙을 호령하던 몽골군을 따라 전파되었다는 설입니다. 광활한 초원을 누비던 원나라 군대에게 동물의 내장은 버릴 것 하나 없는 귀한 식재료였습니다. 돼지나 양의 창자에 고기와 채소, 그리고 선지를 채워 넣은 음식은 이동이 잦은 군대에게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휴대용 전투 식량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칭기즈 칸 시대의 '게데스(Gedes)'를 순대의 원형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는 특정한 요리라기보다 몽골의 내장 요리를 통칭하는 말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유목 민족의 거친 생존 지혜가 담긴 이 '내장 요리'가 한반도의 비옥한 농경 문화와 만나면서, 우리만의 독특한 '순대 문화'로 꽃피웠다는 점입니다.
중국의 고전 《시경》에 기록된 양의 창자 요리부터 몽골 초원의 전투 식량까지, 순대의 족보를 따라가다 보면 이 작은 음식 하나가 아시아 대륙의 거대한 역사를 품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경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혜의 흔적은 동쪽 끝 한반도를 넘어, 서쪽 끝 북유럽의 에스토니아에서도 여전히 뜨겁게 숨 쉬고 있습니다.
한국에 뜨끈한 순대국밥이 있다면, 북유럽의 작은 나라 에스토니아에는 겨울의 추위를 녹여주는 ‘베리보르스트(Verivorst)’가 있습니다. 에스토니아어로 ‘베리(Veri)’는 피를, ‘보르스트(Vorst)’는 소시지를 뜻하니, 이름부터가 영락없는 ‘피순대’입니다.
에스토니아 사람들에게 베리보르스트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선 크리스마스의 상징입니다. 오븐 안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소시지의 향기가 집안 가득 퍼지면 비로소 축제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곤 하죠.
재료를 들여다보면 우리와 닮은 듯 다릅니다. 돼지 창자를 껍질로 사용하는 것은 같지만, 속 재료에서 북유럽의 향취가 짙게 묻어납니다. 당면이나 찹쌀 대신 오동통하게 씹히는 보리를 넣고, 양파와 마늘, 그리고 올스파이스와 마조람 같은 향신료를 듬뿍 넣어 풍미를 더합니다.
그 맛은 어떨까요? 한 입 베어 물면 얇게 구워진 겉면이 '톡' 하고 터지며 안쪽의 부드럽고 녹진한 과육과 선지의 농밀함이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보리의 알알이 톡톡 터지는 식감은 씹는 재미를 더하고, 마조람 특유의 은은한 풀 향기가 선지의 진한 맛을 우아하게 감싸 안습니다. 묵직하고 고소한 풍미가 혀끝을 꽉 채울 때쯤, 에스토니아인들의 ‘비밀 병기’가 등장합니다.
바로 달콤상큼한 링곤베리(월귤) 잼이나 크랜베리 콤포트입니다. "순대에 잼이라니?"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짭조름하고 기름진 순대 한 조각에 차가운 잼을 얹어 입에 넣는 순간, 미식의 신세계가 열립니다. 진한 선지의 풍미가 베리의 날카로운 산미를 만나 뒷맛을 깔끔하게 잡아주고, 이내 입안에서 오케스트라처럼 완벽한 조화를 이룹니다. 여기에 크리미한 사워크림 한 스푼을 곁들이면, 그야말로 미식을 넘어선 ‘미식의 교향곡’이 완성됩니다.
에스토니아의 베리보르스트에 감탄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지도를 펼쳐보면 인류는 아주 오래전부터 ‘피’라는 식재료를 통해 서로 닮은꼴 요리들을 만들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은 제각각이지만, 본질은 하나인 전 세계 ‘블러드 소시지’의 지도를 따라가 봅니다.
영국과 아일랜드의 ‘블랙 푸딩(Black Pudding)’ 영국인들의 아침 식사인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주인공입니다. 선지에 오트밀과 쇠기름을 섞어 만드는데, 구우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포슬포슬한 식감이 일품입니다. 서양판 순대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얼굴이기도 하죠.
프랑스의 ‘부댕 누아르(Boudin Noir)’ 미식의 나라답게 프랑스의 순대는 우아합니다. 선지에 양파, 그리고 우유나 크림을 섞어 푸딩처럼 부드러운 질감을 자랑합니다.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녹진함 덕분에 구운 사과와 함께 곁들여 먹는 고급 요리로 대접받습니다.
스페인의 ‘모르시야(Morcilla)’ 스페인의 순대는 우리와 가장 닮았습니다. 특히 부르고스 지방의 모르시야는 선지에 ‘쌀’을 넣어 만듭니다. 쌀알이 씹히는 든든한 식감 덕분에 한국인들이 현지에서 먹어보고 가장 친숙함을 느끼는 요리이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개성파 순대들 독일의 ‘블루트부르스트(Blutwurst)’는 돼지 선지에 고기와 비계 덩어리를 큼직하게 넣어 씹는 맛을 극대화했고, 이탈리아의 ‘비롤도(Biroldo)’는 건포도와 잣, 향신료를 넣어 달콤하고 이국적인 풍미를 선사합니다.
지도를 따라 내려오다 보면 아시아의 흔적도 선명합니다. 몽골의 ‘초투가산 게데스’는 유목 문화의 거친 생명력이 느껴지고, 핀란드의 ‘무스타마카라’는 에스토니아처럼 달콤한 잼과 어우러져 북유럽의 감성을 완성합니다.
이처럼 전 세계가 각자의 방식대로 선지 소시지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피'를 요리한다는 것이 결코 생소하거나 거북한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고 생명을 온전히 귀하게 여기려 했던 인류 공통의 '가장 오래된 식탁'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순대는 세상에서 가장 ‘인류애’가 넘치는 음식일지도 모릅니다.
동물의 사소한 내장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깨끗이 씻어내어, 그 안에 마을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흔한 곡물과 채소, 그리고 생명의 상징인 선지를 채워 넣었습니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누구 하나 굶주리지 않고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게 지혜를 모은 결과물이 바로 순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주 남문시장의 왁자지껄한 국밥집에서 뜨거운 순대 한 점에 위로받을 때, 지구 반대편 에스토니아의 어느 가정집에서도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지글지글 익은 베리보르스트를 나누며 겨울의 추위를 이겨내고 있습니다. 7,000km라는 물리적 거리는 대단치 않습니다. 검붉고 고소한 이 요리를 나누며 느끼는 삶의 온기는 우리나 그들이나 결코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알쓸신잡' 같은 이 사소한 지식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에는 사람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으며, 그 이야기가 우리를 하나로 묶어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저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 한 접시를 앞에 둔다면 잠시 상상해 보세요. 지금 이 순간, 당신과 똑같은 맛의 감동을 느끼며 행복해하고 있을 지구 반대편의 누군가를 말이죠. 낯설게만 느껴졌던 에스토니아가,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타인이 조금은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