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입의 사치, 파인애플이 핸드백이었던 시절을 아시나요

소나무 열매가 황금 과일이 되기까지, 파인애플에 얽힌 기묘한 인문학

by 티모시

오늘날 우리에게 파인애플은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혹은 피자 위에 올라가 논란(?)을 만드는 친숙한 과일입니다. 하지만 불과 300년 전 유럽에서 이 과일의 위상은 지금의 '에르메스 백'이나 '슈퍼카'보다 높았습니다.


18세기 영국의 화려한 연회장. 한 귀족이 파티장 중앙에 당당하게 파인애플 한 통을 세워둡니다. 사람들은 그 과일 주위로 모여들어 주인의 막강한 재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당시 파인애플 한 통의 가격은 현재 가치로 무려 8,000달러(약 1,000만 원). 재미있는 사실은 이 귀족조차 이 과일을 먹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너무나 고가였던 탓에 파티용으로 딱 하루만 '렌트'한 것이었기 때문이죠. 썩기 직전까지 전시하고 빌려주기를 반복해야만 비로소 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기묘한 과일.


왜 이 과일은 소나무(Pine)와 사과(Apple)라는 생경한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이 달콤한 과일 뒤에는 왜 하와이 왕국의 멸망과 조선인 이민자들의 눈물이 섞여 있는 걸까요?


우리가 미처 몰랐던 파인애플의 발칙하고도 서글픈 역사를 지금부터 따라가 봅니다.


헨드릭 단크츠(Hendrick Danckerts, 1625–1680) - 파인애플을 받는 찰스 2세 (Charles II Presented with a Pineapple)


1.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다: 이름의 유래

이 과일은 이름부터가 흥미로운 수수께끼를 품고 있습니다. 1493년, 콜럼버스가 제2차 신대륙 항해 중 과달루페 섬에서 이 열매를 처음 발견했을 때, 유럽인들의 눈에 비친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했습니다.


그들은 이 열매의 겉모습을 보고 단번에 한 가지 물체를 떠올렸습니다. 바로 거대한 '솔방울'이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솔방울에게도 이미 이름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게르만어권에서 ‘애플(Apple)’은 우리가 아는 빨간 사과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모든 종류의 둥근 ‘열매’를 통칭하는 보통명사였습니다. 여기에 소나무를 뜻하는 ‘파인(Pine)’이 붙어, 솔방울을 지칭하던 원래 이름이 바로 ‘파인애플(Pineapple)’이었던 것이죠. 즉, 소나무(Pine)에서 열린 열매(Apple)라는 뜻이었습니다.


새롭게 발견된 이 열대과일은 솔방울과 너무나 흡사하게 생긴 탓에 자연스럽게 '파인애플'이라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반전은 그 이후에 일어납니다.


이 외래종 열대과일이 큰 인기를 끌며 '파인애플'이라는 이름을 완전히 차지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름을 빼앗긴 진짜 솔방울은 혼동을 피하기 위해 자기 이름을 내어주고, 소나무의 원뿔이라는 뜻의 ‘파인 콘(Pine cone)’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셈입니다.


겉은 솔방울처럼 단단하고 거칠지만, 그 속은 어떤 열매보다 달콤한 과육을 품은 이 과일. 유럽인들은 이 모순적인 매력에 순식간에 매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달콤함을 맛보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혹했습니다.


2. 왕의 혀를 다치게 한 ‘무례한’ 과일의 몸값

유럽에 상륙한 파인애플은 단숨에 왕실과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지만 이 달콤한 과일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고 도도했습니다.


당시 스페인 왕실과 귀족들은 파인애플의 천상적인 맛에 감탄하며 유럽 땅에 직접 심어보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열대 기후에서 자라는 파인애플이 유럽의 차가운 흙에서 싹을 틔울 리 없었죠. 재배에 실패한 그들이 파인애플을 얻을 방법은 단 하나, 남미에서 배로 실어 오는 것뿐이었습니다.


문제는 '시간'이었습니다. 적도의 뜨거운 바다를 건너 유럽에 도착할 때쯤이면, 배 한 가득 실었던 파인애플은 대부분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운이 좋아야 겨우 한두 개가 멀쩡한 상태로 귀족의 식탁에 오를 수 있었죠. 파인애플 한 알을 얻기 위해 배 한 척을 띄워 대서양을 왕복해야 했던 셈이니, 그 가격은 오늘날의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이 과일을 먹는 자를 사형에 처하노라?"


파인애플에 얽힌 유명한 일화 중 하나는 프랑스의 절대군주 루이 14세의 이야기입니다. '태양왕'이라 불리며 세상 무서울 것 없던 그도 파인애플 앞에서는 체면을 구겼습니다. 처음 본 파인애플의 화려한 모습에 마음이 급했던 루이 14세는 껍질도 벗기지 않은 채 과육을 베어 물었고, 날카로운 껍질에 혀를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민망함과 분노가 폭발한 왕은 "이 괴상한 과일을 프랑스에서 다시는 먹지 못하게 하라!"며 금지령을 내렸다는 웃지 못할 기록이 전해집니다. 왕의 혀를 공격할 만큼 도도했던 파인애플은, 역설적으로 그 희소성 때문에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파인애플 한 통을 구한 귀족들은 그것을 감히 먹지 못했습니다. 파티장 한가운데 장식품으로 올려두어 자신의 재력을 과시하는 용도로 썼고, 심지어 파인애플을 살 돈이 없는 이들을 위해 '연회용 파인애플 대여 서비스'까지 등장했습니다. 오늘날 명품 가방을 빌려 파티에 가는 것처럼, 당시 유럽 귀족들은 파인애플을 빌려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상류층의 품격을 증명하곤 했습니다.


3. 달콤한 과육 뒤에 가려진 하와이의 비극

17세기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온실 재배에 성공하며 파인애플의 몸값은 조금씩 내려갔지만, 여전히 일반 대중에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트에서 단돈 몇 천 원에 파인애플을 살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세기 하와이에서 시작된 '플랜테이션(대규모 농장)' 재배 덕분입니다. 하지만 이 대중화의 이면에는 한 왕국의 멸망과 노동자들의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과일 회사 중 하나인 'Dole(돌)'사의 성장은 하와이의 비극과 궤를 같이합니다. Dole의 창업주 제임스 돌의 사촌인 샌퍼드 돌은 하와이 왕국의 마지막 국왕 릴리우오칼라니를 무력으로 퇴위시킨 인물입니다. 그는 스스로 하와이 공화국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하와이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아 백인 자본가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때 사촌 동생 제임스가 받은 막대한 토지가 바로 오늘날 '파인애플 제국'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이 거대한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선 엄청난 인력이 필요했습니다. 이때 모집된 노동자들 중에는 1903년,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로 향했던 조선인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역사에서 한반도 최초의 공식 하와이 이민으로 기록됩니다.


낯선 땅 하와이에서 우리 선조들은 뜨거운 뙤약볕 아래 파인애플 수확에 매달렸습니다. 파인애플은 수확할 때 날카로운 잎과 껍질 때문에 다치기 일쑤였는데, 당시 우리 교포들은 이 과일을 '개불알'이라는 투박한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생김새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고된 노동과 삶의 애환이 섞인 비칭(卑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하와이는 파인애플 세계 수확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관광 명소이자 주산지가 되었고, 우리가 즐겨 먹는 '하와이안 피자' 등의 이름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달콤한 과육 속에는 왕국을 잃은 원주민의 슬픔과, 타국에서 파인애플을 수확하며 뿌린 우리 선조들의 땀방울이 깊게 배어 있는 셈입니다.


에필로그 : 식탁 위에서 발견한 아주 사소하고 거대한 세계

우리가 마트에서 무심코 집어 든 파인애플 한 통. 그 거칠고 단단한 껍질 안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었습니다.


대항해시대 탐험가들의 호기심, 태양왕 루이 14세의 자존심, 유럽 귀족들의 허영심, 그리고 하와이 땅에 뿌려진 이름 모를 노동자들의 땀방울까지. 단순히 '맛있는 과일'로만 보였던 파인애플은 사실 수백 년의 시간을 관통해 온 인류사의 산증인이었습니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이라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파인애플의 어원을 알고, 에스토니아의 순대 이야기를 궁금해하는 그 사소한 호기심이야말로 세상을 더 입체적으로 보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요.


오늘 저녁, 여러분의 식탁 위에 오른 파인애플 한 조각이 이전과는 조금 다르게 보이지 않으신가요? 익숙한 일상도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언제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 거대한 세계가 숨어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 숨겨진 연결고리들을 하나씩 찾아내어 여러분께 배달하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