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들과 함께 한 카페는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갤러리 카페였다.6월의 전시 주제가 심성희 작가의 ‘하쿠나 마타타’다. ‘근심걱정을 떨쳐버리라’는 하쿠나 마타타.
‘타이밍 한번 절묘하네. 지쳐있는 우리를 위한 전시인가?’
메인 벽 화면에 100인치는 족히 넘어 보이는 커다란 캔버스지가 눈에 띄었다. 온통 초록이다. 깊은 숲 속 한가운데를 그린 건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초록의 싱그러움을 좋아하지만 그것만으로 감동한 건 아니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 빨래를 함께 그렸기 때문이다. 새 하~얀 빨래.(강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물결무늬를 넣었다. 정말 새 하앴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새하얀 빨래가 숲 속 나무에 건 빨랫줄에 가지런히 널려 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그림에 자꾸 눈길이 갔다.
카페에서 나갈 즈음, 작품에 더 가까이 다가가 섰다. 주변에 사람들이 없었다면 한참을 서서 감상했을게다. 매력적이었다. 새하얀 빨래를 다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음의 묵을 때를 말끔히 벗겨내주는 것 같다’ 생각하자, 좁혀있던 미간의 근육들이 나사를 풀었다. 동시에 입꼬리도 올라갔다. 중앙에 그려진 빨래 한번, 초록이 가득한 숲 속 전체 한번. 나의 시선이 부분과 전체를 오가자, 구겨져있던 심장이 기지개를 켰다. 온몸에 탄산수가 터져 나올 듯 한청량감도 선사했다.
‘삶이 즐거워야 혹은 의미 있어야 행복하다’는
생각을 느슨하게 놓아주었다.
삶이 즐겁지 않은데 행복했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가 하나도 없는 듯한데 행복했기 때문이다.
뜻밖의 장소에서 평온함과 기쁨을 동시에 맛보았다.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공원을 거닐며 밀려오는 평온함에 기뻤던.
보고 싶던 친구가 불쑥 안부 문자를 보내주어 반갑고 고마운.
지인들과 이야기 나누며 ‘행복하지 않아.’라고 말한 것이 제한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을 생각하며 행복이라 정의했을까?
‘자식, 신랑, 시댁이 내 뜻대로 되는 삶’을 행복이라 생각했을까?
그리 정의한다면 문득문득 찾아온 만족감이나 기쁨이 서운해할 것 같다.
행복을 다양하게 사유하게 만들어 준 책이 떠올랐다.
바버라 프레드릭슨의 ‘내 안의 긍정을 춤추게 하라.’는 책이었다.
그녀는 긍정적 정서를 10가지로 구분해서 소개했다.
‘ 즐거움, 감사, 평온, 관심, 희망, 자부심, 재미, 영감, 경외심, 사랑’이었다.
10가지로 세분화해 놓고 보니 염미정의 설렘 (문을 잡아주어 고맙다고 인사하는 학생에 대한)과 안도감(오늘 토요일이다!)그리고 나의 청량감까지 포함시키고 싶었다.
(이리 써 놓고 보니 글을 쓰기 전보다 더 다양한 긍정 정서를 찾은 것 같아 흐뭇했다.)
삶의 의미가 느껴지지 않아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어디에서나 출몰한다. 자식 때문에 골머리 썩는다는 J는 카페에서 나와 함께 동네 한 바퀴를 도니 기분이 좋아졌다고 했고 신랑과의 언쟁으로 마음이 불편했던 H는 반려견 초코와 간밤에 함께 잤을 자고 나니 기쁨이 찾아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