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티에 Dec 27. 2021

유모차를 끌고 어딘가로 간다는 건

맘충이로 보일까 봐 신경 쓰였어


‘맘충(mom蟲)’.

나는 이미 돼 있던 걸까. 나만 몰랐던 사이에 말이다.

누가 ‘맘충’을 만드는 걸까.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엄마는 모두 ‘맘충’이 되는 걸까?     


유모차를 끌고 어딘가로 간다는 건     


아기를 낳고 골반이 많이 안 좋아져 아기띠를 하지 못한다. 코로나 19로 베이비 시터를 구하기도 여의치 않아 11개월째 독박 육아 중이다.

2년째 미루고 있는 논문을 재개할 엄두도 안 난다. 하루 한 페이지의 논문을 읽기도 벅찰 만큼 육아는 생각보다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동반한 어려운 작업이다.

그런 육아 중에도 꿀 같은 순간이 있다. 바로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산책을 하고, 카페에 앉아 잠든 아기 옆에서 책을 보는 거다. 코로나 19로 오랫동안 밖을 나오지 못했던 나와 아기는 두 달 전부터 콧바람을 제법 쐬고 있다.


두 번의 유산을 겪고 얻은 아기라, 나는 임신을 하자마자 일을 쉬었고 근 2년 가까이 오로지 이 아이만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동안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여자들이 세상 제일 부러웠다. 두 번의 유산은 이처럼 ‘육아맘’들이 세상 가장 위대한 존재임을, 가장 축복받은 대상임을 일찌감치 깨닫게 했다. 미혼이었던 시절엔 절대 알 수 없었던.


남편은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가장 비싸고 좋은 유모차를 사줬고 그건 아이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내게 주는 선물과도 같았다. 그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유모차 맘들처럼 거리를 맘껏 활보해 다니라고.     


지난 주말 학회지 한 권을 들고 남편과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 카페에 들렀다.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이 커피가 맛있다며 가보라 한 곳이다.

이미 며칠 전, 아기와 둘이 방문했을 때 매장 안에 또 다른 엄마가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봤기에 그곳은 유모차가 들어가도 되는 곳이란 확인이 돼 안심했다. 간혹 싫어하는 눈치를 주는 곳들이 있어 요즘 어딜 가나 ‘유모차가 들어가도 되는지’부터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직원에게 메뉴를 추천받고 주문을 하고, 유모차가 있으니 좀 더 공간이 허락된 테라스 쪽으로 자리를 잡아 책을 폈다.

그 후 주문을 받은 직원은 퇴근했고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출근했다. 시간이 흐르자 테라스는 좀 더운 것 같았고 모기도 있어 아기가 걱정돼 자리를 옮기고 싶어 졌다. 매장 안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사장에게 눈으로 유모차를 가리키면서 자리 이동 가능 여부를 확인했다.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아기를 봐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좀 과한 부탁이었지만 너무 급했고 그 남자 사장은 흔쾌히 들어줬다. 3~4분 만에 돌아와 보니 아가는 이미 그 사장과 웃고 있었다. 솔직히 커피 맛은 별로였지만 고마웠고 너무 편안한 느낌을 주는 카페였다.

그래서 주말 남편까지 셋이 재방문을 했다. ‘지난번에 고마웠다’라고 다시 한번 더 말하고 싶기도 했다.


매장 안 사람은 지난번 내가 다녀갔을 때만큼 차 있었고 사장도 그때 그 직원도 모두 있었다.

하지만 그날 본 사장과 직원의 표정은 우리가 유모차를 끌고 등장하는 순간부터 일그러져 있었다.

순간 나는 ‘괜한 나의 기우겠지’라고 여기며 테라스 쪽으로 자리를 잡고 망설이다 너무 더운 것 같아 매장 안쪽으로 옮겼다.

그러자 매장 안쪽에 있던 다른 팀이 이때다 싶어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고, 우린 덕분에 더 넓은 자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주문을 하려는데 사장은 자리를 비웠고 그 직원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유모차는 안된다’는 얘길 했다.

뭐가 안된다는 건지 되묻자 원래 ‘유모차는 매장에 들어오면 안 된다’는 거였다.


순간 난 내 귀를 의심했고 지난번에도 유모차를 끌고 온 적이 있다고 하자 그때 누가 허용했는지는 모르지만 안된다고 했다.

“그쪽이 있었고 조금 있다 퇴근했고 사장님이 잠깐 우리 애도 봐주셨는데요. 언제부터 왜 안 되는 거죠? ‘노 키즈존(영유아 및 어린이의 입장을 금지하는 업소)’인가요?” 당황한 나머지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직원은 “원래 안 되는 거고 그땐 그냥 ‘내쫓지 않은 것’이며 테라스 등 다른 손님이 이동하는 데 문제가 되지 않는 자리에 앉을 경우는 터치하지 않지만 매장 안쪽은 안됩니다”라고 했다.

난 점점 더 이해가 되지 않아, 지난번 사장이 있을 때 안쪽 자리로 이동하면서 확인까지 한 상황을 얘기했다.    

  

나는 평소 노 키즈존에 대해 찬성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결혼 전부터 여섯 명의 조카와 시간을 같이한 적도 많았고 결혼한 후론 노 키즈존은 사실 불편한 맘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기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건 ‘선택의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또 이 카페의 문제는 노 키즈존의 합법성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내 첫 방문 때 나름대로 카페 측은 내게 최대한의 서비스를 했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은 매장 이용 여부를 사전에 문의했고 정확한 안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돌변한 카페 측의 서비스에 대해 느껴야 하는 불쾌감은 고스란히 모두 내 몫이라는데 있다.


남편은 이미 붉으락푸르락 나가자고 호통쳤다.

평소 화라고는 거의 내지 않는 사람이라서 나는 더 당황했고, 직원은 오히려 남편분이 왜 화를 내냐며 내게 물었다.

난 그 직원에게 쓴웃음 한번 지어주고는 이렇게 말했다.

“제 남편은 불쾌할 수 있는 거죠. 어찌 됐든 들어온 손님을, 그것도 들어오자마자 상황을 얘기하며 양해를 구한 게 아니라 다짜고짜 안된다는 얘기부터 했으니까요.”

직원은 지금 양해를 구하고 있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이어진 그 직원의 말은 이 모든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리기에 충분했다.

“(유모차를 끌고 왔던) 다른 손님들은 '쫓겨나기'도 했었는데 지난번에 오셨을 땐 그냥 (손님과 유모차와 아기를?) 둔 거예요”.


세상에 맙소사!

나는 뒷목이 뻐근하고 눈이 급 뻑뻑해졌다.

‘아.... 이 사람, 말을 참 저렴하게도 하네’.

사실 그 직원은 사장의 지시를 받았을 뿐이고, 나 역시 직원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또 유모차가 들어오면 어떤 불편함 때문에 그런 것인지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서비스 마인드를 제대로 탑재한 직원이 조금 미안한 표정이란 포장지를 이용해서라도 양해를 구했으면 안타까워하며 발길을 돌렸을 거다.

그런데 그 직원은 첫마디부터 시작해 표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이 너무 서툴다.

그래서 상대가 굳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상대가 쌈닭이 되고도 남을 만큼 자극적이다.

남편은 “뭣하러 더 얘기해 나가자고 나가!”라고 하며 나를 잡아당겼고, 나는 끝까지 “아 이해했어요, 저희 나갈게요. 알겠어요 무슨 말인지”라고 하며 카페를 나왔다.


................

나는 나오자마자 돌변해 남편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뭐 그렇게까지 화낼 일이라고 그렇게 성을 내느냐고.

기분은 나도 나쁘고 나쁠 수 있는 일이지만 화를 내는 방법이 문제라고.

남편은 내가 화가 나서 직원에게 따질 것 같았고 그래서 더 화가 났다고 했다.

자신이 아내와 자식을 무언가로부터 잘 지켜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조금은 멀리 나간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거였다.

남편이 이해가 된다. 나도 불쾌했으니. 하지만 나는 정말 궁금했다. 지난번에 방문했을 때와 거절당한 날의 차이가 무엇인지. 하지만 그건 나에게나 중요한 것이지 그 직원은 자신들의 규정에 반발하는 손님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나는 이해하고 나왔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맘충이로 보일까 봐 신경 쓰였어”     


그렇게 나오고 다른 카페에 가서도 나는 내내 기분이 안 좋았다.

오히려 그 카페를 나설 때 기분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는데 나오고서야 알 수 없는 불쾌감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기를 재워놓고 남편을 불러 앉혀 얘기했다. 그리고 울었다.

내가 화가 난 이유는 그렇게 화를 내는 남편이 평소 남편 같지 않았고, 그만하지 않은 일로 그렇게 화는 내는 방식이 날 화나게 했다고.

남편은 수긍했다. 하지만 날 울게 만든 건 두 번째 이유였다.


“샤워를 하며 곰곰이 생각해봤어. ‘별로 기분 상하지 않은 그 일이 이후 내내 날 불쾌하게 만드는 이유가 뭘까’라고. 바로 ‘맘충’이었어. 나는 그 매장에서 당신이 화를 내고 우리가 달그락거리며 나가는 게 싫었던 거야. 결국 나갈 때도 맘충이로 보이는 게 싫었어”.

유모차를 끌고 매장을 이용하는 맘(mom)들은 그 직원이 ‘내쫓았다’란 표현을 주저 없이 써도 될 만큼 트러블 메이커들이었을까.

아니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육아맘들을 ‘맘충’으로 규정해 놓고 다른 손님들과는 달리 조금 덜 공손하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의 입을 통해 저렴한 말들을 선택한 그 직원은 사실 조금 서툰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반면 앞서 ‘쫓아낸’ 손님들과 나를 동일 시 한 마음이 그의 태도에 반영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당시 그 직원의 그 저렴한 말을 듣고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화를 내서는 안 되겠구나. 당연한 권리를 요구할 필요도 없겠구나…….’     


술집에서 한 테이블이 시끄럽게 떠들며 술을 마신다. 시끄러운 그 옆 테이블 사람들이 온갖 인상을 쓰며 괴로워해도 누구 하나 저지하는 경우는 없다. 술을 마셨으니. 누구든 술을 마시면 시끄러울 수 있는 거니까.     

아기 역시 카페에서 울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을 방치하는 엄마들 때문에 노 키즈존이 생기고 '맘충'이란 신조어가 생긴 거겠지만(물론 위험한 계단이 있을 경우에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노키즈존'을 만든다. 하지만 걸음마 조차 떼지 못한 아이들이 계단에 오르진 않는다.) 요즘에는 그런 문제의 부모를 탓하기에 앞서 모든 육아맘 자체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다.

또 이동수단이 한정적인 아기들의 유모차는 정말 다른 손님들을 불편하게 하는 골칫덩어리인가.

잘 모르겠다. 내 머릿속에 언제부터 이런 생각이 있었던 건지. 침소봉대는 여기까지만.   

  

지난겨울 아기를 재우고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면서 비슷한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도 나는 잘 공감하지 못했다. 당시 아직 아기가 어려 밖으로 데리고 나가지 못해 그런 일을 경험하지 못해 그랬을 수도 있지만, 김지영을 ‘맘충’이라고 수군대는 영화 속 직장인들에게 나는 일침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출산으로 일을 쉬고 있지만, 병아리 기자였던 시절, 나는 툭하면 부장도 들이받고 당국자도 들이받는 ‘욱’하는 사람이었다. 정의감이 넘쳐 상사에게 들이받는 기자였다고 포장하고 싶지만 사실 ‘욱’하는 성격 때문이 90%다.     

그런데도 안 잘리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기자는 소위 ‘물어다 주는 것’ 즉, 지시받는 쪽이 아니라, ‘스스로 물어오는’ 일을 해 상사에 보고하는 업무 특성상 그렇다. 누구보다 그 기사를 취재한 기자 당사자가 윗선 누구보다 그 기사에 대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부당한 윗선 지시에 ‘욱’하고 들이받는 일이 종종 있었던 거다. 그런 조직문화 덕인지, 탓인지 이런 '욱하는 성격'과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성격'을 다듬을 기회가 없었다. 물론 온화한 성품으로 훌륭한 뉴스를 만드는 기자들도 많겠지만 나 같은 타고난 ‘쌈닭’은 좀 피곤하지만 나름 이런 성격이 일에서 만큼은 그 빛을 발했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조금 달라졌다.     


mom은 맘이 아프다     

지난겨울,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오기 전, 갓난아기를 데리고 지인 부부를 백화점 카페에서 만났을 때 ‘맘충’을 바라보는 그 시선을 처음으로 느꼈다.

지인 부부는 당시 아들 둘을 유모차에 태우고 우리 아이의 것까지 하면 총 3대의 유모차가 있었다. 우리 유모차는 공간의 협소함을 의식해 매장밖에 세워뒀지만, 지인 부부의 유모차 두 대는 조금 비좁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인 부부가 등을 지고 있어, 보지는 못했지만 나를 정면으로 좀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있던 젊은 여자 두 명이 지인의 유모차에 두는 시선을 나는 분명 느꼈다. 경멸의 눈빛이었다.

그날 ‘자기들은 나중에 아기 안 낳고 유모차 안 끌고 다닐 줄 아나 보지’라며 혼자 구시렁거리고 말았지만, 아직도 그 젊은 여성들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 나는 그때처럼 누굴 탓하기 어렵다. 그저 그들의 시선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내가 그런 시선을 받을 만큼 잘못하고 있는 것은 없는 것인지 자기 검열을 쉬지 않고 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나를 ‘맘충’으로 규정해 놓더라도 ‘왜 그런 것인지’ 물어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시비비를 가릴 여력이 남아있지도 않은 나 자신이 참을 수 없다.

공공시설에서 남들에게 피해가 가도 아이들을 교육하거나 자제시키지 않는 엄마들을 비하는 ‘맘충’이란 말이 적용되는 범주는 아주 넓다.

가끔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엄마’가 ‘맘충’의 대명사로 비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누군가의 보호가 절실한 어린 생명을 보살피는 것이 비단 부모 즉, 엄마에게만 국한된 것일까. 사회가 어느 정도 아기의 자연스러운 상황을 이해하고 수긍해 주기는 어려운 것일까.     

어렵게 갖은 아이, 그런 아이를 낳을 때 즈음, 모든 사람의 축하를 받았고 이 아이가 영아기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대부분 사람에게 환영받고 축하받는 존재일 거라고 착각해왔던 것 같다.


mom이 경고한다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 무책임한 엄마를 지적하는 ‘맘충’을 힘든 육아에 지쳐 탈출구를 찾듯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엄마들에게 비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그 소중한 아기들을 골칫덩어리로 여기지 말라고 감히 경고한다.     

사실 ‘맘충’을 지적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프게 느끼는 엄마들은 진짜 ‘맘충’이 아닌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보통 ‘맘’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기 전 그 쌈닭 혈기의 내가 그립다.

맘 카페에서 흔하게 보이는 ‘이것도 맘충에 해당하나요?’라는 글들이 아프다.

글 하나하나에 '아니다'라고 토닥거려주고 싶고 대신 싸워주고 싶지만 나 역시 아프다.

유모차 대신 노트북 가방을 들었던 내가 다른 사람이 될리는 없을 터인데, 왜 이리 ‘맘충’이란 타인의 잘못된 시선을 의식하는지 모르겠다.

나만 ‘충(蟲)’이 아니면 되는 게 아닌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