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여자둘이살고있습니다. #책리뷰
걸림 없이 후루룩 하고 읽혔다. 산뜻한 느낌. 그래서 가볍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한번 완독 한 후 밑줄 친 내용들을 다시 공책에 옮겨 적다가 새삼 이 책에서 내가 얻은 것이 많구나 하고 느꼈다. 다정하고 호방하면서도 섬세한 문체로 누군가와 공생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전달한다. 책을 읽다 보면 두 저자의 모습이나 성격이 상상이 간다. 그래서 더 재밌다.
어떤 부분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고, 어떤 곳에서는 현실 웃음을 빵 터트리며 읽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문장은 헉, 하며 내가 했던 행동에 대한 반성적 사고를 가지게 했고, 또 어떤 부분은 앞으로 나의 삶에 지침으로 삼아도 될 법한 내용이었다.
가령, 내가 고개를 끄덕였던 부분은 아래와 같았다.
몸과 마음에 기운이 필요할 때는 스스로 잘 먹여야 한다는 깨달음, 혼자 당당하게 고깃집에 들어가 2인분을 구워 먹을 수 있는 경험치, 작은 실패를 삼키고 내려보내는 소화력 같은 것 말이다. ("혼자력 만렙을 찍어본 사람" 中)
혼자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어떻게 하면 나를 잘 보살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몸이 아프면 누구에게도 칭얼댈 수 없고 상황이 심각하다면 덜컥 두려움이 몰려오기 마련이다. 일전에 한 번 집에 혼자 있다가 패닉 어택이 온 적이 있었다. 학업과 관련하여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었는데, 며칠간 괜찮더니 빨래를 널다가 별안간 발작을 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울음이 터졌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데 진정이 되질 않으니 정말 무서웠다. 몇 시간 후에 밥을 하다가 또 한 번 그런 류의 발작이 일어났고, 몸을 달달 떨며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받지를 않아 수 십 분을 소리 내어 울다가 겨우 진정이 됐다. 연락이 닿은 애인이 놀라 후다닥 달려왔지만 그것도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이후에 나는 혼자 있을 때 그런 류의 발작이 또 오게 될까 봐 늘 긴장상태로 있어야만 했다. 이후로 ‘나를 보살핀다’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됐다. 나의 신체 상태나 마음의 상태를 가장 내밀하고 우선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나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에는 오히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른 이에 의해서 나의 건강하지 못함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1차적으로는 나에 대해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에 대해여 어떤 신호가 감지되었을 때, 그 신호는 무시되어선 안된다. 몸이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스스로 컨디션을 끌어올리거나 아예 휴식을 취하는 등의 처방을 내려한다. 마음이 불안정할 때 역시 마찬가지다. 스스로를 다독이거나, 휴식을 주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거나. 어떻게 다룰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고, 이것은 모종의 연습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다. 이 연습이 잘 되어있지 않으면 혼자 사는 이들의 피로는 제대로 회복되지 않고 일종의 만성피로가 된다.
나는 김하나를 통해 세상에 딸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대체로 잊어버리고 살다가 같이 장을 볼 때마다 새롭게 놀란다. 그리고 한 알 한 알 먹어치우는 동안 의아하다가 조금 슬퍼진다. 어떻게 이런 게 맛이 없을 수가 있을까. 하지만 사람이 같이 살아가는 데 있어 꼭 같은 걸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을 이해한다고 해서 꼭 가까워지지 않듯,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곁에 두며 같이 살 수 있다. 자신과 다르다 해서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평가 내리지 않는 것은 공존의 첫 단계다.(“두 종류의 사람” 中)
위 문단과 시력에 관련하여 모든 사람은 세상을 자신의 주관대로 다르게 본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관계들에 대해 반성하게 됐다. 사실은 잘 알고 있지 않나. 상대방과 나의 입맛이 다르다는 것, 상대방과 나의 생활습관이 다르고, 그와 나의 영화 취향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렇지만 종종 그 본질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이게 좋을 수 있지? 어떻게 이게 안 좋을 수 있지? 어떻게 이걸 못 볼 수 있지? 그러나 인간의 인식 작용은 결코 객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이상하게 바라보거나 평가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자주 잊어버려서 아차차, 싶을 때가 많다. 그런 것을 활자화된 내용으로 읽게 되니 왠지 한 번 더 다짐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 같아 공책에 옮겨놓았다.
좋은 동거인이 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쭉 기숙사 생활을 했기 때문에 룸메이트가 있었다. 거의 매 분기마다 룸메이트가 바뀌었는데, 그중에서 나의 생활 패턴에 완벽하게 맞았던 룸메이트는 단 한 명뿐이었다. 다른 이들이 나빴던 것이 아니라, ‘나’의 생활 스타일에 적합했던 것뿐이다. 내 기준에 좋은 룸메이트란, 나의 삶에 침범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거리에서 나와 시간을 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나와 그 친구는 고등학교 기숙사 룸메이트였는데, 우리는 서로 밥을 따로 먹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왜인지 룸메이트들이랑은 늘 밥을 같이 먹어야만 할 것 같은 암묵적인 룰(?) 같은 것이 있었다. 최소한 주중의 저녁은 늘상 그런 느낌이었고,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각자 먹었다. 매번 보고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같이 방에 있을 때는 대화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날도 많았다. 각자 드라마를 챙겨보거나 게임을 하거나 숙제를 하거나 했다. 그러다가도 희한하게 둘이 눈이 딱! 마주치는 날이 있었다. (거의 늘 금요일 저녁) 그런 날이면 학교 밖 피자가게에 가서 하와이안 피자 한 판과 사이다를 시켜서 배부르게 먹고 기분 좋게 기숙사로 돌아왔다. 어딘가 텔레파시가 통했다고 해야 할까. 서로 다니는 무리가 달랐는데도 나는 그와 있을 때 가장 편안했다. 그 경계라는 것은 모호하다. 나의 삶을 침범하는가 아니면 존중해주는가. 나는 다른 이에게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친구에게는 나 역시도 ‘완벽한 룸메이트’였다고 하니, 어느 정도 안도가 된다.(ㅎㅎ)
밖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집안을 돌봐줄 ‘아내’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그 ‘아내’는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다. 때론 가사도우미일 수도. (“집요정 도비의 탄생” 中)
이 부분은 친구들과도 자주 얘기했던 부분이라 웃기기도 했다. 나와 내 친구들은(전부 여자) 모두 아내를 가지고 싶어 한다.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따뜻한 밥을 지어놓고 깔끔하게 집 청소를 해놓는 사람.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비단 남성들만의 바람이 아니라, 많은 여성들 또한 바라는 지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직 많다. 집안일은 어렵다. 때때로 즐겁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늘상 그런 것은 아니고, 아무리 해도 티가 나지 않아 생색을 내기에도 어렵다. 며칠 전 나는 아침부터 청소를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저녁이 다 돼있었고, 청소 중인 방이 청소 전과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피로가 몰려들었다. 그러니까, 자기 일이 있는 사람이 집안일까지 모두 다 감당하기는 정말 힘든 일이다.
지금도 나는 방 안에서 일을 하기엔 목전에 수많은 노동 거리가 늘어져있어 짐을 싸매고 카페에 나와 이 글을 쓰고 있다. 집에 있으면 자리에 앉기까지가 너무 힘들다. 뭐 좀 해볼까, 하면 배가 고파져서 밥을 차려먹고, 밥을 먹었으니 설거지를 한다. 그러고 나면 왠지 지쳐서 유튜브를 본다. 유튜브를 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자, 하고는 책상 정리를 하다가, 청소기를 돌리다가, 빨래를 돌리다가. 그러고 나면 어느새 저녁이 와있다. 과장 같지만 정말이다. 그러면 저녁을 먹어야 하고, 저녁을 먹으면 설거지를…… 카페에는 잠시 도피처럼 와있지만 집에 돌아가면 다시 집안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단지 그들을 유예시키고 밖으로 도망 나왔을 뿐이다.
밖에서 일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는데 청소와 빨래가 깨끗하게 되어있고 밥이 차려져 있는 삶을 상상하는 것은 즐겁지만, 그 뒤에는 분명 누군가의 노동이 있다. 하루빨리 가사노동을 해주는 로봇이 발명되면 좋겠건만.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부분도 크게 공감이 갔다. 나는 여태 내가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결혼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을 뿐이었다. 상대의 가족과 어떤 결합을 원하거나, 재산을 합치거나, 하는 류의 생활형태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거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말 그대로 ‘동거인’으로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문란하게 여겨지는 문화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왜 동거를 이야기하면 광란의 섹스파티부터 연상하는지. 그러나 나는 현재 애인이나 이후에 만날 수도 있는 애인들과 같이 살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다가도, 현재 한국의 상황이나 분위기를 보면 그렇게 행동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앞선다. 내가 애인과 동거를 했을 때, 부모님은 잘 설득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이후에 친척들이나 주위 지인들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피로한 위치에 처한 부모님에 대한 걱정이 크다. 유튜브의 “같이 사는 사이 chanhyuk”는 그런 면에서 나에게 큰 용기를 준다. 동거 커플의 생활을 가시화하고 일상화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한번 찾아보시길 바란다. 영화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중 가장 덜 좋아하는 영화에 속하긴 하지만, 대안 가족의 모습을 제안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서로의 니즈가 맞는 이들끼리 한 공간에 모여 산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지탱해주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준다. 그것이 가족이 아니라고 하기가 내 입장에서는 논리적으로 어렵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단순히 ‘두 명의 사람이 같이 사는 이야기’는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관계해야 하는지, 인간은 어떻게 공존/공생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 공존의 형태가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의 형태는 너무나 단일—여자와 남자가 결혼하고 그 둘 사이에 아이가 있는 가족의 형태. 이른바 ‘정상가족’—해서, 사람들은 마치 그것만이 정상이고 그것만이 유일한 형태의 안정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너무 없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각자의 삶은 너무나도 다양한데 사회가 우리에게 지향하라고 요구하는 방향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
현재 나는 자취를 하고 있고 혼자 지내는 삶에 크게 만족하고 있지만 언젠가 나이가 들면 한 공간에서 같이 살아갈 동거인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늘 그런 미래를 염두에 두고 있다. 상대가 애인이나 남편이 될지, 친구가 될지, 또 다른 형태의 관계에 있는 누군가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때가 됐을 때, 이들과 비슷한 류의 삶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은 동거인을 구해서, 서로를 배려하고 또 싸우기도 하면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 지금 내 나이가 스물일곱이니까, 마흔까지 넉넉잡아 15년이 남았다. 그 기간 동안 나는 차곡하게 경험치를 쌓을 것이다.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이에게 건강하고 좋은 동거인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