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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Apr 04. 2020

뱉지 못한 모래

삼킨 말들이 고문하는 밤

말을 하는 것이 세상 어느 일보다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먼저 상상으로 뱉고, 상대의 표정을 살피고 그 반응에 속수무책으로 상처받고 다시 삼킨다. 삼킨 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본 상대의 표정도 속수무책 떠올랐다. 뱉지 못한 말들에 고문당하는 밤이 여러 날 있었다.


학년이 높아지고 중학생이 되면서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까먹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듣는 타인이 심히 신경 쓰였고 순간적인 상처에도 쉽게 말을 포기했다. 순간 순간 스치는 타인의 표정에 말을 맞추려 했었고 그 시도는 성공률이 높았다고 느꼈지만, '성공률' 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스스로는 빠르게 지쳐갔다. 그렇지만 그 시기에는 친구에게 받는 거절감이 스스로에 대한 존중감을 잊게 만드니까 더욱 그런 방식의 노력을 이어갔다.


‘말’은 필연적으로 오해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럼에도 머리로는 안다고 해도 오해받는 것에 부딪칠 수 밖에 없을 때- 적응되지 않는 초조함을 느끼며, 당황스럽고 억울하고 호소하고 싶어져 속으로 끊임 없이 상대들에게 말했었다. 마음속으로 하는 말은 효과가 없었다. 엉켜버린 마음, 더 안 좋은 결말에 대한 상상 중 어느 하나 해결 되지 않고 오히려 더 나빠지기만 해서 불어난 오해가 내 마음에 모래처럼 가라앉아 걸어 다닐 때나, 잠들기 전이나 서걱 서걱 껄끄러워서, 조그만 미풍에도 스크래치를 남겨서 더 화가 나곤 했다. 화라기 보단 떨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내가 어떤 말을 골라도, 어떤 표정을 골라도 평생 오해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구나 하는 공포.


그러면서도  또한 타인을 자유자재로 오해했음은 부인할  없다. 두려움이 바탕이 되는 경험을 기준으로, 마음속으로 상대를 가혹하게 몰아세우고,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지도 않고, 영원히 이해할  없는 사람으로 가늠해 버렸던 .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  모든 것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소화하고 있다. 여전히, 누군가를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책을 집착하듯 볼 때도 있었다. 읽는 건 자유로웠다. 표정을 살피지 않아도 되고, 읽고 싶은 곳까지 얼마든지 읽을 수 있고, 덮고 싶을 때 덮을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마음 속에 모래를 쌓는 일은 멈추고, ‘ 하고 싶다.

말을 안 하고 싶어서 도망쳤던 게 아니라 더 가까워지고 싶어서, 더 이해받고 싶어서 어려웠었다.


‘말’이 미운 것들만 수반한다고 하기에는, 나를 숨쉬게 했던 순간도 여럿이다. 말을 하는 것이 세상 어느 일보다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다고 해도, ‘말’이, '대화'가 행복을 주는 순간들도 많았다.


고등학생 , 학교  벤치에서 연습을 하다가 우연히, 일하시는 아주머니랑 길게 대화한 적이 있었다.  아주머니의 표정, 말투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대화할 때의  감정과 표정도 기억난다.  얼굴을 내가 보지 못했는데도 그렇다. 서로에게 공감했고, 뭔가가 자꾸만 튀어 나왔고, 잠시나마 서로를 이해했다. 일상의 역사를 모르는 타인과의 대화가  깊이 있는 말로 인도하는 순간도 있다.


그냥 ‘  때가 있고 진짜 ‘ 나눌 때가 있다. 웃음을 방패 삼아 어색한 시간을 넘어서려는 , 하고 싶은 진짜 ‘ 삼키고 허울 좋은 것들만 골라서 나오는 ‘’, 가까워지고 싶어서 비밀들을 섞어내는 ‘’,  꺼내서 토해내는 ‘’.  어쩌면 인간은 배설하지 않고는 죽어버리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안에 있는 것들이 어느 통로로든 나와야 죽지 않는 존재. 영감이든, 분노든, 기쁨이든, 사랑이든, ‘이든.

mounde studio / kyma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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