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의 시선은 늘 다른 존재들을 향해있었다. 학생일 때는 모두가 좋아하는 아이, 연기할 때는 다른 빛나는 배우. 사랑받는 존재, 선택받는 존재들-
처음 연기를 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을 때는 연기만 생각해도 얼굴이 붉게 상기될 만큼 너무나 설레고 온갖 상황들을 상상하며 울어보고, 눈물 흘리기에 성공하면 나 천재 아닌가 하며 곧 유명 배우가 된 미래를 단번에 그릴만큼 단순했다. 복잡한 어른이 된 지금 그때를 떠올리면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무모한 생각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감정이 연기하고 싶은 욕구의 시작점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내 안에 갇혀있는 말, 감정, 생각 같은 것들-내 안에 침체된 채 사라지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을 그냥 ‘나’로 써는 표현할 용기가 도저히 없다고 느꼈던 걸까? 다른 인물을 입어 그 깊숙한 것들을 꺼내고 싶었던 것일까?
이런 내 바램과는 반대로, 연기를 하면서 역할을 만나 나와는 다른 인물의 말을 뱉고 지문대로 움직이는 것이지만, 나의 목소리로 내 몸으로 움직인다는 아이러니. 그러니까 결국 스스로를 인정해주지 않고,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떤 인물도 잘 연기할 수 없다고 느낀다. 스스로에게 무지하면 타인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듯이.
수정이, 민지, 수연이, 예은이, 지혜, 정순, 폴린, 아키미, 진영, 윤진, 소연, 앤, 지원, 경주, 소피, 솔희, 진숙이, 처선, 보라, 리비, 하나, 점순이… 내가 연기했던 인물들의 이름이다. 직업도 다양했다. 대학생, 영화감독, 건축가, 기자, 경찰, 사회복지사, 작가, 간호사, 미술 선생님…
그렇지만 정작 ‘나 자신’ 이 되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내 모습보다도 나 자신을 사랑할 때의 내 모습은 무지했고- 편향적이었다. 연기에 좋은 평가를 받았을 때나 타인들에게 애정 받고 있다고 느낄 때- 대체로 뭔가를 잘 해냈다고 느낄 때의 나는 기특하고 자랑스러웠지만, 오디션 장에서 덜덜 떨며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나오거나, 무례한 상대에게 한 마디도 못했을 때, 누군가에게 미움받는 것을 느낄 때의 나는 징글맞게 우는 아이처럼 느껴져서 떼어내고만 싶었다. 달래주는 것이 그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일이라고도 생각했고.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매몰찰수록 발전은 더디어졌다. 연기적인 발전이든, 인간적인 성숙이든.
스스로가 되기 어려운 까닭은 결국 ‘나’ 로서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가 되어서, 어떤 모습이 돼야만 인정과 애정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애처로운 가치를 갖고서 타인들을 인색하고, 대하기 어려운 심사위원처럼 느꼈다.
그렇지만 스스로를 침울하게 바라보고 무가치함의 잣대에 밀어 넣은 것이 과연 누구인지. 나라는 역할에게 본인 스스로가 악역이 되었던 무수한 순간들.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직업을 선택하고는, 나를 안아줄 생각은 하지 못했던 무지한 순간들.
나는 이제 자꾸만 타인을 향해 가는 시선을 멈추고 내가 되고 싶다. 다른 인물들을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나 자신이 되고 싶다.
다른 이들을 한 껏 꿈꾸고 나서야,
나를 미워할 대로 미워하고 나서야
처음 꿈을 꿨던 나로 돌아간다. 분방하고 얼굴이 붉어졌던 나로. 누구든 될 수 있던 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