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든 삶이든
며칠 전 센티멘탈 벨류라는 영화를 봤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노라는 연극배우이다. 영화의 초반, 노라는 무대에 서기 전 극심한 불안에 휩싸여 대기실을 나서지 못한다. 이후 스텝들의 성화에 대기실을 나가긴 하지만 무대 뒤에서 동료에게 때려달라는 둥, 자신의 의상을 찢는 둥 기이한 행동을 이어간다. 배우인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난리 통은 겪지 않았더라도 노라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노라는 왜 이토록 통제 불가한 두려움을 주는 ‘연기’를 계속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노라와 동생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라 -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마도 인물을 구축하는 것 같아 그 관점으로 뛰어들거나 다른 사람이 돼 그 감정을 느끼는 거지 그럼 내 감정도 더 안전히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아그네스 - 자신이 되기는 싫어?
나도 카메라 앞에서 적지 않은 수치를 느껴왔다. 얼굴 근육이 굳고, 볼에 열감이 느껴지며 발갛게 달아올랐다. 또 혀가 굳어 발음이 잘 안된다든지, 걷는 자세가 이상하게 느껴지고 몸이 뻣뻣해지는 긴장 현상과 불안감이 준비한 모든 것을 허사로 만들었다. 두어 번 정도는 나 때문에 몇십 명, 몇 백 명의 스텝이 잠시 쉬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또는 잠에서 깼을 때 확 끼쳐오는 막연한 불안감. 오래 연기를 해 왔으면서도 다시는 못할 것 같은 두려움(기회가 없을까봐가 아니라, 행하지 못할 것 같은-) , 어떻게 하는 게 잘하는 연기인지, 내가 배운 것들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갑자기 모든 게 뒤죽박죽된 것만 같은 혼돈- 센티멘탈 밸류의 노라처럼,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연기이고, 가장 도망치고 싶은 일이 연기였다. 긴장은 나의 적이었고, 일상에서도 때때로 찾아오는 긴장은 나를 나 일수 없게 만들었다.
긴장은 늘 나의 과제이지만, 최근 간 현장에서 긴장으로부터 자유함을 느꼈다.
왜 자유해졌을까? 나이가 주는 여유와 경험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이 편안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순간순간에 집중하는 힘을 일상에서 조금씩 배웠기 때문 아닐까? 아, 그보다 전에,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정신없던 나에 대해 알게 되었기 때문 아닐까?
한 사람과 오랫동안 사귀면서 나는 나의 가장 별로인 면모와 괜찮은 점들,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표정이나 말투, 또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하는 행동 같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스스로 오랜 일상의 기복을 통해 알게 된 것들. 늦은 시간이라고 생각되는 때에 일어나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 내 몸을 잘 챙기는 기분이 들 때 –건강에 좋은 것을 챙겨 먹고 피곤해도 조금이라도 운동을 하는– 자신감이 생긴다. 무슨 일을 하던 ‘괜찮아, 천천히, 마음껏 천천히 해도 돼’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해 줄 때 더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과 무엇을 하던 더 좋은 것, 더 완벽한 것을 추구해 왔던 내가 가장 작은 것부터 제대로 해보자고 생각할 때 마음이 가장 유연해질 수 있다는 것.
스스로 제일 싫어하면서도 변화되기 어려웠던 부분은 상대가 나에 대해 부정적인 얘기를 한다고 느낄 때 올라오는 방어하는 마음이었다. 타인의 말을 듣지 않았고, 듣지 않으니 수용하지도 못했다.
나 자신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인간적으로 형편없다고 느낄 때의 슬픔. 그 슬픔이 쌓였을 때의 무기력한 시기를 지나, 인정하고 나아가자고 되뇌었던 날들. 멋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쓰기보다, 솔직하게 존재하자고 다짐하는 요즘의 나날들.
삶에 대한 태도가 변하면 비로소 연기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연기할 때 자유로운 순간은 스스럼없이 하는 것, 그냥 하는 것, 내가 나인 것을 수용하고 드러내는 것.
그래서 요즘 가장 기쁜 일은, 나의 부족함을 마주하는 일이 주저되어 연습하는 것도 두려울 때가 있었는데, 석우와 거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거리낌 없이 연기하는 시간이다. 큰 화면으로 내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또 해보는 것. 지금 당장 연기로 돈을 버는 배우는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여러 정서들을 경험하고 내 안에 축적하는 일을 지속할 수 있다는 것이 요즘 나의 배우로서의 정체성과 긍지가 되어주었다.
노라처럼 내 감정을 인물 뒤에 숨어 마음껏 드러내고서 싶어서 연기를 시작했지만, 조금씩, 인물을 입지 않고도 나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있고, 그를 통해 어떤 일이던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키워가고 있다.
요즘, 결혼 후 가족과 만나는 시간이 소중해지니, 그냥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이 많은 순간들을 망치곤 했는데, 그냥 '존재' 하는 것만으로도,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순간을 만들어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온전한 내가 될 수 있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