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을 때까지 생산성 추구하기!
먹고
한가위 다가오기 전부터 조금씩 장을 본다. 내가 아니라 어머니가. 올해부터 자궁근종 치료로 8 체질 검사 후 비교적 철저한 식단 조절하는 딸을 위해 고기는 조카들을 위해 구이용으로 냉동실과 냉장실에 둔다.
금양체질에 맞는 고사리와 시금치, 금양체질에는 맞지 않지만 콩나물과 도라지도 다 국산으로 준비하는 그녀. 차량 트렁크에 찧은 오른손이 진정될 무렵, 고구마와 오징어를 튀기다 기름 몇 방울이 어머니 손을 덮쳤다.
"앗, 뜨거워!"
찬물로 열기를 식히고 민간요법으로 참기름을 발랐다고 했다. 나중에 기름이 튄 부위가 빨갛게 달아올라 사놓은 화상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상처 부위에 약을 발랐다. 집안일하다 보면 화상연고가 필요한 순간이 생기니까. 미리 사둔 보람이 있다.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이번 한가위에 튀김을 배부르도록 먹었다.
보고
스레드에서 누군가 <<동경일일>>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는 글을 올렸길래, 책장에 꽂혀 있던 세 권을 꺼냈다. 어릴 때 꿈이 만화가여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 힐링이 되고 한때 애니메이션 디자인 학원에서 생계를 내려놓고 잠시 그림을 배운 적이 있다. 그림은 첫사랑이어서 묻어둔 오랜 연인이자 평생의 숙명 같은 존재여서 그 책이 나왔을 때 주저 없이 샀다. 만화가로 38년 동안 살았던 이의 사인이 인쇄된 책이라길래, 초판본이어야만 한다고 판단했다. 1,2권은 세트로 샀고 다음 해에 3권을 샀다.
1권을 읽는데, 지금은 퇴물 취급받는 거장들을 찾아가 꿈의 잡지를 간행하려는 주인공의 마음이 너무 먹먹하게 다가와서 아팠다. 마치 묻혀둔 된장이나 간장을 맛보며 먼저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심경이랄까? 읽으려던 책을 덮었다. 내 처지가 처연하게 다가와서 계속 읽어갈 자신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2년 만에 다시 펼쳐든 책은 갈증을 해소하듯 속도가 붙었다. 단숨에 1권부터 3권까지 읽었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고통... 그 여정 속에야말로 진실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자라서 마음에 닿는 문장을 발견하면 소화에도 시간이 걸린다. 여행을 다녀와도 하루는 그 여운을 만끽할 시간이 필요하다. 글도 무언가 건드려지면 속도가 생긴다. 억지로 구조화해서 쓰지 못한다. 달리 느림보 거북이가 아닌 것이다.
꼭 완성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창조하는 고통 속에 진실한 기쁨이 있다는 진리를 만화책에서 발견하고 안심이 되었다.
쓰는
"이모는 안 줘?"
막내 조카가 할미에게 추석 용돈 받고 이모인 내게 묻는다.
"이모는 평소에 주잖아. 차비, 친구랑 놀러 갈 때, 뭐 필요할 때... 다 이모한테서 나가잖아."
더 이상 묻지 않는 조카. 그 모습조차 귀엽다.
어제는 친구랑 놀러 간다며 용돈 받아가서는 오후에 샤인 머스켓 한 박스를 들고 왔다. 명절이라고 2천 원 주면 행운권 추첨처럼 선물 뽑기 할 기회를 받는가 보다. 친구들은 다 꽝인데 혼자 샤인머스캣 세 송이가 담긴 박스를 들고 사나이답게 집에 온 조카.
"돈 벌어왔습니다!"
얼마나 웃기던지. 오랜만에 큰일 해서 어머니는 또 만 원을 조카에게 상금으로 주었다.
날(day)
긴 연휴, 갈 곳도 만날 이도 없다. 마음 같아서는 어머니께 용돈 백만 원 드리고 조카들 데리고 해외여행이나 가면 좋으련만, 그럴 처지도 능력도 안 된다.
"책 봐야지."
어머니 말씀처럼 밀린 책을 하나씩 읽기 좋은 시간이다. 피곤하면 자고, 일어나서 출출하면 먹고, 심심하면 문구 쇼핑에 나선다. 어제 본 만화, 마지막 장면에 작가의 책상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에 모노 mono지우개가 보여서 주문했다. 그 작가처럼 한 분야에서 승승장구(?)하고 싶어서.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고 싶어서. 그런 마음으로 기원하듯 소형 지우개와 리필 볼펜심을 샀다.
먹고 보고 쓰는 날, 나의 한가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