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실현한다는 건

탐구 에세이

by hun
다양성에 대하여

세상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그림을 통해 나타낸다는 생각, 순수한 아름다움을 위해서 실용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물건을 만든다는 생각, 자신이 가진 서정성에 생명을 불어넣어 음악과 시를 쓴다는 생각. 예술이라 불리우는 무상과 무용의 아름다움. 단순히 창작물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서 세계의 다양성에 대한 소비. 자연의 힘은 다양성 속에 있다. 좋고 나쁜 것을 어떤 기준으로 가를 수 있단 말인가. 갖가지 종교, 갖가지 철학, 갖가지 지혜, 이기주의, 도량이 넓은 이, 우매한 이, 영리한 이, 슬픔에 빠진 자들이 다 있어야 한다. 이것저것 다 모여 있는 것이 위험한 게 아니라 그 다양한 것들 중에서 어느 한 종류가 다른 종류 때문에 소멸당하는 것이 위험한 것이다. 인류는 생산성 극대화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fodism이라 일컫는 균형이 아닌 단일 최적화를 택했다. 예로 농업에서는 알곡이 실하고 결빙에 잘 견디며 물을 덜 필요로 하는 유전적으로 거의 동일한 가장 좋은 이삭만 취급한다. 하지만 이러한 환경에서는 으레 병충해가 돌게 되면 전체 농지가 전멸당하기 마련이다. 같은 성격과 면역 및 성장 패턴을 공유한다는 건 취약점도 동일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연 생태계는 유전적 변이가 퍼져 있어 일부는 죽어도 일부는 살아남아 개체군 전체가 멸종하지 않는다. 저마다의 특성과 약점과 비정상을 지니고 있는 야생의 밭에서는 병이 돌 때마다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을 작물 스스로가 찾아내는 것이다. 자연은 획일성을 싫어하고 다양성을 좋아한다. 자연은 바로 그 다양성 속에서 본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아실현이란

사실 자아실현은 창작이나 어떤 할 일을 찾는 것이 아니어도, 정말 작은 의미로도 성립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 나답게 살기'. 이 안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될 수도 있다. - 누군가 질문할 때 5초 정도 고민하기. 하루에 좋아하는 책 한 페이지라도 읽기. 밥 먹고 천천히 산책하기. 떠오른 생각들을 글로 몇 줄 남기기. 바다를 앞에 둔 집에 살기. 곤충 관찰하기, 좋은 음악과 영화 앞에서 멈추어 서기. 좋아하는 게임을 하며 그 감각을 온전히 느끼기... 거대한 과업이나 업적에서 끌어내려 사소한 일상이 될 수도 있다. 성취가 아닌, 매 순간 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려는 습관의 총합 말이다. 인간의 욕구를 나눈 이론 중 하나인 매슬로우 이론은 하위 욕구가 충족되어야 상위 욕구를 추구하는 동기가 생긴다는 피라미드 구조를 띤다. 계층에는 생리적 욕구, 안전 욕구, 사회적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 욕구가 있는데 (뒤늦게 자기 초월 욕구라는 예외적 6단계를 추가하긴 했지만) 이는 일방향으로만 가는 구조로 설명이 되어있지만, 자아실현을 통해 하위 계층 욕구의 의미를 축소 수도 있다. 사회적, 존경 욕구가 충족되지 않고 반복적으로 결핍을 겪을 시 자연스레 추상적 문제(왜 인정이 중요한가, 인정이란 무엇인가, 타인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자아라는 게 실현해야 할 대상인가)가 생겨나고 존재론적 인식을 하기 시작하며 하위계층의 욕구가 퇴색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와 '세계'의 관계를 더 추상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말이다. (예로 '실존주의적 모델'에서는 욕구가 이렇게 재배열된다. - 1. 나는 존재한다. 2.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 3. 타인과 세계에 관계를 맺는다. 4. 의 부여 자체를 중단한다. 5. 의미 없음마저 수용하고 살아간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화되기에 자연스레 외부적 가치에 대한 동기를 상실하는 것. 칸트적 자율성, 실존주의와도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러한 자아실현을 이루어낸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를 다른 개체가 외부에서 관찰할 때의 경우 무기력으로 판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이는 자기완결적 세계가 커지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욕구층위를 해체하는 것 자체가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문제에서 나온 것이기에 방어적 자기구조를 형성하며 비롯된 현상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연스레 세월과 함께 타인으로 인해 요동치지 않는 자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외부 평가에 비의존적 구조가 성립됨으로써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 욕구, 자아, 관계 전체를 탐구하는 구조로 확장한다. 분석하고 사물 사이의 관계를 쪼개고 나누고 나눈다. 그 구조를 토대로 메타 인식을 강화하고 비판적 사고의 칼날을 다룬다. 하지만 이렇게 내면의 인식 구조를 고도화하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일종의 내면적 완결 회로가 형성된다. 사고 구조가 기능으로써 작동하는 게 아닌 자아의 골조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분명 그건 보호적이고 단단하지만, 자신의 세계가 무한히 확장되지 못한다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앎은 또 다른 앎의 죽음인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앎의 어머니가 무지인 것이다. 하지만 세계에 어른이면서 어린아이인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도심 속 사람
도심에는 사람이 너무 많아. 항상 화가 나 있어 그게 내가 요인이 아닌 걸 알면서도 그 에너지를 불가피하게 받는데 흔한 표현인 빌딩 숲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날카로워져 있는데 누가 그렇게 안 살면 죽인다고 한 것도 아니고 본인 안의 울타리를 너무 좁고 높게 쌓아서 얼마 없는 공간에 숨 막히고 울타리에 뭐라도 묻으면 그거만큼 열받을 수가 없어. -dongdi

도심 속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이 부족하다. 도심일수록 한정된 공간에 인구의 밀도는 높기에 시공간의 값어치가 높기 때문이다. 한정된 공간과 시간을 두고 경쟁하는 구조는 서로를 날카롭게 만들 수밖에 없다. 빌딩숲은 사실 배경에 불과할 뿐, 진짜 문제는 공간적 시간적 자원의 희소성이다. 심지어 그 파이를 고루 나누어 갖고 있지도 않다. 때문에 좌석 하나, 엘리베이터 몇 분, 지하철 자리, 통화 소음, 직장까지의 거리, 점심시간 1시간 반. 이 모든 게 경쟁인 것이다. 사람들은 말하진 않지만 이런 생각이 내재되어 있다 "내 시간과 공간에 침범하지 마" 이 제로섬 게임에서 타인은 곧 침해 요소가 된다. 사람들은 "공격적"인 게 아닌 그저 생존을 원하는 것이다. 타인이 만들어낸 긴장 상태를 내가 수동적으로 받는다. 누가 그렇게 안 살면 죽인다고 한 것도 아닌데도 모두 날카롭다. 하지만 그건 강제된 윤리이며 암묵적 규범이다. 계급주의와 보호주의, 자본주의에 길들여져야 현 사회가 존속할 수 있다. 환경이 행동 양식을 유도하는 구조적인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핏덩이로 태어나 맞이한 어머니에게, 친척에게, 언니에게, 형에게, 선생님에게, 둘도 없는 친구에게.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수많은 바이럴 마케팅에 노출되어온 사람들이 이 문제를 점 찍어서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또 그걸 인식한다고 한들, 이미 어려서부터 자라온 환경을 바꾼다는 건.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되는 순간이다. 현재까지 이어온 자신의 정체성까지도. 하지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인가. 무엇을 얻자고 이런 일을 지속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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