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사는 건 무엇일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대하여

by hun
새로운 삶

친구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제주도에 다녀왔다. 공항에 도착해 221번 버스를 타고 표선면사무소에서 내렸다. 멀리서 친구가 다가왔고 가벼운 인사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사뭇 달라진 친구의 모습에 적잖은 시간이 흘렀음을 느꼈다. 그렇다.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하루가 얼마나 길고 동시에 얼마나 짧을 수가 있는 것인지, 비슷한 하루들은 '하루'라는 경계를 무너뜨려 시간관념을 무뎌지게 한다. 그렇게 멈추었던 시간이 '제주도'라는 공간의 변화와 친구를 재회하며 다시 흐른 것이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될 때는 새로운 삶을 사는 것 같다. 게으르게 뛰던 심장이 다시 펌프질을 하는 것이다. 다시 무대에 오른다는 마음가짐으로, 리허설에서의 허물을 깨끗이 씻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새로운 삶을 살 때면 항상 이상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역할에 심취하여 작은 언동, 눈빛, 어조, 정말 사소한 몸짓, 시선 처리, 인간관계를 대하는 태도 등 모든 것들을 나의 이상 안에서 통제했다. 가치관조차도 말이다. 연출하고 싶은 사람의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은 내게 손쉬웠다. 극 중 역할에 도취되어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큰 희열을 느꼈다. 때로는 이런 스스로의 모습이 본질은 도덕률도 어떠한 잣대도 없는 무()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무대도 끝이 있듯이. 이러한 연출이 지속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결심은 기껏해야 기억력의 노예일 뿐, 태어날 땐 맹렬하나 본래 그 힘이란 미약하지 않은가. 격정 속에 우리들이 자신에게 제안한 건, 그 격정이 사라지면 결심조차도 사라지지 않는가. 세상에 영원이란 없으며, 사랑조차도 운에 따라 바뀐다는 것을.


좋은 안목

내가 아직 군복무 중이었을 때, 휴가를 나와 친구와 이중섭 미술관을 간 적이 있다. 그중 이중섭의 황소를 조형 미술로 만들어낸 작품이 있었고, 당시 나는 그 작품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빼빼 마른 황소.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옆에서 친구가 도드라진 골격을 보며 말했다. "용 같다." 당시 나는 그 말을 듣고 경탄을 금치 못했던 것 같다. 집에 가서도 계속해 그 기억을 되새길 만큼.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를 갖고 다양성을 직관하는 능력이 내게는 없다. 적어도 시각적인 예술작품에서는 그랬다. 그리고 그런 친구의 통찰력은 비단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들 (이미지, 음악, 요리 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분야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보였다. 사물과 현상의 다른 면을 따져보는 것. 부피를 가진 3차원의 도형을 여러면에서 바라보는 것. 나에게는 그 고유한 안목이 귀중해 보였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친구가 사는 공간은 고요하다. 주변에는 목가적인 환경이 구성되어 있다. 분명히 그러한 공간은 사유의 밑거름이 된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사유의 시간을 갖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의 노예가 아닌 자주독립하여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식의 한계

다음은 아인슈타인의 연설문 일부분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방식에 맞춰 세계를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그림으로 바꿔놓으려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린 이같은 우주를 체험의 세계와 어느정도 대체함으로써 체험의 세계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렇다. 사람들은 판단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그럼, 그 판단은 무엇에 기반하는가. 지식과 인식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이 두 가지에 지나치게 의지한 나머지 그 틀에 묶여 살아간다. 하지만 지식이나 인식이란, 그 성질이 매우 모호한 것이다. 세계라는 거대한 사막에서 모래 한 줌을 손으로 쥐고 알갱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는 것. 우리는 거대한 사막을 보지 못한 채 그 한 줌만을 세계라고 칭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손에 쥐어진 모래로 타인과 격론을 벌이는 것. 그것은 토론이라는 유쾌한 마법에 이끌려 자신의 무지몽매함을 잊는 공허한 지혜일지도 모른다.


사실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하면 삶을 사는 데에는 정해진 방식이 없다. 자신의 잣대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그 신념조차도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저 다른 감정선, 다른 가치관의 상충으로 생긴 오해이자 갈등일 뿐이다. 애시당초 도덕률이란, 사람의 정신세계 밖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위 사진은 지구에서 250광년 떨어진 별 '스피카'의 관측 사진이라고 한다. 먼 우주에서 관측한 지구도 조그마한 점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조그마한 점 안에 사람들이 자글자글 모여 그 안에서 각 개체들이 많은 것들을 주고 받고, 희노애락을 느끼고, 여러 조직과 질서, 신념과 사상이 생긴다는 것을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차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