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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름 Mar 13. 2024

그네와 고무카


어렸을 때 8살까지 그네를 혼자 못 탔다. 누가 밀어줘야만 했다. 혼자 타고 싶어서 피아노학원 갔다 오는 길에 엄마 몰래 놀이터에 들러서 연습을 했다. 아무리 낑낑대며 앞 뒤로 몸을 흔들어도 꿈쩍도 안 했다. 2살 어린 동생도 그네를 혼자 탈 줄 알았는데. 그네 요놈은 나한테만 요지부동이었다.


처음 고무카를 마주하던 날. 왼손 뒤로 - 오른손 쭉 뻗어 뒤로 구부려서 손깍지 끼세요- 난 깍지는커녕 손가락 끝도 안 닿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착착착 깍지 끼고 심지어 어떤 분은 등에서 팔을 떨어트리는 게 아닌가- 선생님이 나한테 스트랩을 가져다주셨고 꼼지락대며 어떻게든 손을 붙여보려고 했으나 전혀 1mm의 움직임도 없었다. 머쓱. 수련 끝나고 남편(그때는 남자친구)에게 이거 해봐! 하니까 너무 자연스럽게 두 손을 맞잡는 거다. 아니 왜 나만 안되냐고요. 집에서 아무리 어깨를 열고 수건을 맞잡고 별 짓을 다해봐도 안 됐다. 정말 정말 너무 안 됐다.


어느 날은 그네 앞뒤로 몸을 막 흔들어제끼면서 발을 구르다가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혼자 너무너무 창피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일어나 미끄럼틀만 다섯번이나 탔던 기억이 난다. 그 후로 슬쩍슬쩍 그네를 건드려보기는 했지만 차마 대담하게 정복하지는 못했다. 잠깐 앉아서 연습하다가도 놀이터에 누군가 오면 바로 일어나기 시전. 안 되는 건 죽어도 보여주기 싫었던 꼬맹이었다.


고무카 해볼게요. 선생님 구령에 맞춰 어깨를 충분히 열고 팔꿈치를 접어 손을 날개뼈까지 갖다 댔다. 그리고 반대손을 위로 뻗고 접어서 툭. 어? 내 손 끝의 촉감이 느껴졌다. 이럴 땐 손가락이 길어서 좋다. 설마 되겠어? 그래도 조금 더 해볼까? 어깨가 편안해졌을 때쯤 양손을 맞잡아서.


걸어냈다.


헉. 나 지금 한 거야?


한동안 학원 끝나고 놀이터에 가면 아이들이 많아서 그네 연습을 못했다. 그날은 약간 흐리고 선선했다. 웬일로 조용한 놀이터 모래바닥에 피아노가방을 내려놓고 그네에 살짝 앉았다. 몸을 흔들흔들하다가 다리를 구부렸다 폈다 움직였다. 바람을 따라 몸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몸을 자연스럽게 흔들대니 시야가 조금씩 변해갔다. 어! 이제는 억지로 움직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네와 하나가 되어간다.


움직이고 있다.


 나, 지금 그네 타고 있다.!


나마스떼- 감사합니다. 수련이 끝나고 다들 분주히 매트를 정리하고 옷을 갈아입는 사이 슬쩍 다시 뒤로 두 손을 갖다 대본다. 잡힌다.! 물론 한쪽뿐이지만. 분명 잡혔다. 뒤에 눈이 안 달린 게 너무 속상한 순간이었다. 마음속으로 꺅 소리를 질렀다. 나, 고무카 할 줄 안다!

태정님 아까 손 잡히던데요? 심지어 선생님이 보고 계셨다. 네네 맞아요. 드디어 잡았어요. 그것도 저 혼자.


이 맛에 요가하는건가요 선생님.


탁- 살며시 착지. 믿기지 않아서 괜히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모래와 흐린 하늘과 그네를 잡은 손에 배긴 쇠냄새도 뭔가 모든 것이 오늘을 위해 준비된 선물인 것만 같다. 들뜸을 가라앉히려 멍하니 발을 내려다보다 내팽개친 피아노가방을 들고 집까지 전력질주. 후다다다닥.


엄마! 나 그네 탈 수 있어요!


8살 꼬맹이의 벅차오름이 마음속에서 고요히 흐른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지금의 나와 마주한다.


노란 피아노가방을 들고 하얀 스타킹을 신고 청치마에 시장표 에나멜 구두를 신은 꼬맹이가 그네를 탄다. 나한테 잘했다고 말해주는 듯 웃음을 지으며 그네를 탄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듯 힘차게 몸을 움직여 그네를 탄다.


서른살이 되어도 여덟살처럼 기뻐할 수 있어서,

그 감정이 깨워진 오늘을 마주할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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