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글리 Jun 07. 2017

나의 때가 반드시 온다

[북리뷰]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읽고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고흐의 자화상

내가 고흐에 대해 기억하는 건 딱 3가지다.

 광기, 가난, 자살. 

예전에 뉴욕현대미술관 (MOMA로 불린다)에 가서 고흐 그림을 직접 보았을 때도, 큰 감흥은 없었다. 강렬하고 독특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화풍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그가 쓴 편지 구절을 접하고, 그의 삶에 급관심이 생겼다.  

"사랑하는 동생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어쩌면 우리의 자잘한 슬픔들을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떤 점에서는 인류의 거대한 슬픔들까지도 말이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은 고흐가 네 살 터울 동생인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것이다.  테오는 고흐의 유일한 후견인이자 친구였다. 고흐는 18년동안 테오에게 668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내는데,  이 책은 그중 고흐의 삶과 예술 세계를 잘 보여주는 편지를 선별해 엮어냈다. 


고흐는  37년간 살면서 지독한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늘 고독했다. 스스로를 '새장 속에 갇힌 새'와 '개'로 표현했으며, 자신의 귀를 자르고, 자주 발작을 하다, 종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뿌리깊은 고뇌를 가진 화가였다. 


요즘 괴롭고 우울한 시간을 맞고 있던터라, 깊은 고통을 가졌던 '고흐'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의 편지를 읽으면서 조금 놀랐다. 이야기로 전해듣던 것과는 다른 고흐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광기’로 표현되던 그의 내면은 매우 섬세했고, 동생 테오에 대한 애정과 인간적인 고뇌들이 가득했다.  그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양심’, ‘두려움’, ‘색채’, ‘생계’, ‘실패’, ‘노력’, ‘돈’, ‘있는 그대로(~답게)’, ‘슬픔’, ‘평온’, ‘사랑’, ‘예술’  


위는 고흐가 평생동안 지켜내고자 했던 가치이자, 그를 괴롭게 만든 것들이기도 했다.


천재도, 광인도 아닌 고민하고 자신의 길을 끝까지 가고자 노력했던 한 인간, 고흐. 그의 생애를 이해하면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가 고통으로 몸부림 치는 것을 보면서 내 안의 고통도 함께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선택한 길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가야 할지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자신의 길을 절룩거리며 걸어갔던 한 초라한 영혼이 희한하게도 큰 힘을 주었다. 다음은 그의 편지글 중 와닿는 것들을 뽑은 것이다.



"새장 속에 갇힌 새"

고흐는 1853년 네델란드에서  태어났다. 고흐는 엄격한 칼뱅파 목사의 맏아들로 태어나 신학공부를 하지만, 자신을 지배하는 열정에 따라 결국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고흐는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생전의 삶은 고통과 비참함의 연속이었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수도사나 은둔자처럼 편안한 생활을 포기하고 나를 지배하는 열정에 따라 살아가기로.”(201쪽)


그는 자기 안에 뭔가가 꿈틀거리고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지만 그를 마음껏 분출할 수가 없다고 토로한다.


"내 안에 무엇인가 있다. 그것이 도대체 무얼까? 그런 사람은 본의 아니게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경우다. 원한다면 나를 그가운데 하나로 봐도 좋다. 새장에 갇힌 새는 봄이 오면 자신이 가야할 길이 어딘가에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안다. 해야할 일이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단지 실행할 수 없을 뿐이다. (중략) 본의 아니게 쓸모 없는 사람들이란 바로 새장에 갇힌 새와 비슷하다. 그들은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정말이지 끔찍한 새장에 갇혀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해방은 뒤늦게야 오는 법이다. (24~25쪽)


그가 서서히 미쳐버린 것도 이해가 간다. 그는 이미 마음 속에서부터 갇혀 있었던 것이다. 고흐는 그를 빠져나오기 위해 애썼고, 그림을 그리는 것만이  탈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겼다. 먹고 마시는 시간도 아까워할 정도로 모든 것을 그림에 투자했지만, 늘 더 많이 그릴 수 없는 걸 안타까워했다. 이런 열정 덕분에 고흐는 37살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10년동안  900점 가량의 유화와 1100점이 넘는 스케치를 남길 수 있었다. 2주에 하나 꼴로 작품을 완성한 셈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 초기에 고흐는 자연과 농부들의 그림을 자주 그렸다.


"나에겐 그림밖에 없다"

“우리는 노력이 통하지않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을 팔지 못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고갱을 봐도 알 수 있듯 완성한 그림을 담보로 돈을 빌리는 일도 불가능하니. 아주 중요한 그림으로 얼마 안되는 금액을 빌리지도 못하다니. 이런 일이 우리 다음에도 계속될까 두렵다.” (206쪽)


고흐는 생명을 바쳐 그림을 그렸지만, 제대로 인정받질 못했다. 화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정이 곧 돈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한 정열은 누구보다 넘치는데, 세상은 그의 그림을 알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고흐는 내내 두 가지 생각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물질적인 어려움 vs 색에 대한 탐구


예술에 대한 고집스런 열정이 물감을 사기도 빠듯한 경제 사정과 늘 충돌했기 때문에 고흐는 더 많이 고뇌했다. 


"지난 5년 가량의 세월 동안, 나는 안정된 직장 없이 늘 궁지에 몰린 채 방황해 왔다. 너는 내가 그동안 뒷걸음질만 치면서 나약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그 생각이 옳을까?나도 이따금 밥벌이란 걸 했다. 그렇지 못할 때는 친구들이 신의를 베풀어 도와주었지. 좋든 싫든 얻을 수 있는 것을 치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살아왔다.( 중략)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을 멈춘다면, 나는 패배하고 만다. 묵묵히 한 길을 가면 무언가를 얻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20)


고흐는 자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게으르다, 실패한 인간이다' 라 생각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더욱 그림에 매진했지만 그때문에 자주 우울해했다. 스스로를 개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들(어머니와 아버지를 말한다)은 덩치가 크고, 털이 많으며, 집 안에 지저분한발로 드나들게 분명한 개를 집에 두기 망설이는 것처럼 나를 집에 들이는 걸 꺼려한다. 그래, 그 개는 사람에게걸리적거리고 짖는 소리도 아주 큰, 불결한 짐승이다.”(105)


고흐는 어디서고 환영받지 못했는데 가족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목사가 되길 바랐던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고 화가가 되었고, 고집스런 성정으로 가족들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훗날 갈 곳없는 매춘부를 들여 같이 살면서 가족과는 더욱 멀어졌다.  


"싫든 좋든 나는가족에게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존재, 나쁜 놈이 되어버렸다.그러니 내가 어떻게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겠니? 그래서 멀리 떠나있는게 최선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다." (17)  


그중에서도 고흐가 유일하게 연락하고 애정을 지니고 있던 사람은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였다. 테오는 미술판매상으로 형의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테오가 없었다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없었을 것”이라며 고흐는 동생을 의지하고 친구처럼 여겼다.



"나는 개다"

 “더럽고, 복장도 형편없고, 매우 불손한 사람이었어요. 다들 그를 미친놈이라고 했죠."


'진 칼멘트'라는 고흐를 알고 지내던 여자는 그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편지에서는 하도 다정스러워 고흐의 광기를 짐작할 수 없지만, 현실에선 그렇지 않았나보다. 그즈음 (1889년), 그는 함께 지내던 고갱과 크게 싸워 헤어졌고, 자신의 귀를 잘라서 병원에 입원했다. 그곳 사람들은 고흐가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덕분에 고흐는 얼마간 갇혀 지내기도 했는데, 자진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기도 한다.

고흐의 자화상.  고흐가 자기 귀를 자르고  입원했다가, 퇴원 뒤 그린 그림이다.

고흐는 실제로 신경쇠약에 시달렸는데, 정신이 명료할 때는 그림 그릴 때 뿐이었다. 그 외의 시간에는 수 많은 감정에 치여 괴로움을 자주 토로했다. 그는 열정이 있었지만, 자신의 그림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그림에 몰두했다. 그림에 대한 열정과 욕망은 매우 높았지만, 자신의 그림에 대한 평가는 다른 사람이나 자신이나 매우 혹독했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스스로를 가치있다고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성과없이 빈손으로돌아와 그래도 먹고 자고 돈을 쓰는 날이면, 내 자신이 못마땅하고 미친놈이나 형편없는 망나니, 혹은 빌어먹을영감탱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185)  


울고 있는 노인 (1890) 좌절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생 레미 시기에 그린 것이다.

고흐는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생계를 거의 전적으로 동생에게 의지했는데, 그때문에 늘 미안해했다.


“넌 내 생활을 위해벌써 15만 프랑가량의 돈을 썼다. 그런데.... 우리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중략) 쥘 뒤프레는 그를후원해주는 예술애호가를 만났다지. 나도 그럴 수 있었더라면.....그래서 이렇게 무거운 짐을 너에게 지우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195)


동생에게 수 백통의 편지에서 그가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적은 거의 없었다. 돈이 생기면 그는 물감을 사거나 모델을 사는데 거의 다 썼는데 이런 속도로 그림을 그리다간 지출이 너무 많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실제로 고흐는 초상화를 몹시 그리고 싶어했지만, 모델비를 구하지 못해서 자신의 얼굴을 그렸다. 돈은 그에게 죄책감을 많이 주었다.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원하는 건빚을지지 않는 것이다.사랑하는 동생아, 너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그걸 모두 갚으려면 내 전 생애가 그림 그리는 노력으로 일관되어야 하고, 생의 마지막에는 진정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 (217)  


고흐는 그림이 팔리지 않는 걸 매우 신경썼는데, 동생이 그로인해 더 큰 짐을 안게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흐는 자주 우울해했다. 그러자, 동생 테오는 이런 편지를 형 고흐에게 보낸다.


"이번 기회에 형에게 확실하게 말해 두고 싶은게 있어. 난 돈문제와 그림을 파는 문제, 그리고 경제적인 것과 결부된 모든 일을 존재한 적이없는 일처럼 생각해. 설령 존재한다 하더라도 질병같은 거라고 말야. 그문제로 너무 머리아파하지는 마. (중략) 형은 내게 빚진 돈 얘기를 하면서 갚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아. 내가 형에게 원하는 건 형이 아무런 근심없이 지내는 거야.” (219)


고흐는 이런 동생을 위해서라도 더 많이 작업하려고 했다. 그의 편지를 읽으면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그를 더욱 더 작업에 매진하도록 한 원동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나 자신을 지키고 싶다"

"언젠가 모베는 “자네가 자네만의 예술을 계속 추구한다면,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더 깊이 파고든다면, 자네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네.”라고 말한 적이 있다. 2년전의 일이다. 요즘 들어 그 말을 자주 생각한다.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찾았다. 바로 그 개가 나 자신이다. (중략) 나는 그 개의 길을 택했다는 걸 너에게 말해주고 싶다. 나는 개로 남아 있을 것이고, 가난할 것이고, 화가가 될 것이다. 또 나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 (107)


고흐는 결국 자신의 말대로 되었다. 자신의 길을 택했고, 그 길을 굳건하게 갔고, 화가가 되었고, 또 가난했다. (고흐는 돈에 절절매면서도 돈을 매우 경멸했다.) 그리고 자연 속에 항상 머물렀다. 그가 해바라기, 별밤, 농부들을 많이 그린 것도 자연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고흐는가끔 동생에게 예리한 통찰을 지닌 말을 던지곤 했다.

"너는 아직도 네가 평범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다고 했지. 그러면서 너는 왜 네 영혼 속에 있는 최상의 가치를 죽여 없애려는 거냐? 그렇게 한다면 네가 겁내는 일이 이뤄지고 말 것이다. 사람이 왜 평범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그건 세상이 명령하는 대로 오늘은 이것에 따르고 내일은 다른 것에 맞추면서, 세상에 결코 반대하지 않고 다수의 의견에 따르기 때문이다." (107)


여담이지만, 희곡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여동생에게 글을 쓰고 싶다면 공부하는 대신‘ 행동’을 하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많이 즐기고 많은 재미를 느끼는게 필요할 뿐 더 이상의 공부는 필요치 않다고 말이다.


"대부분의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발전하게 돼 있다. 그러니 너무 기를 쓰고 공부하지는 말아라. 공부는 독창성을 죽일뿐이다. 네 자신을 즐겨라! 부족하게 즐기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즐기는 쪽이 낫다. 그리고 예술이나 사랑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마라. 그건 주로 기질 문제라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아니다."(156)


고흐는 예술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적용시키지 못한 것 같다. 그는 내내 자신의 그림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더 배워야 하고 더 훈련해야 한다고 말했고, 자신의 삶을 즐기기 보다 불태웠다.  모든 걸 바쳤지만,그 노력의 대가를 돌려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고흐의 절망은 매우 컸다. 예상은 했지만, 그의 편지를 읽는 내내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마음을 괴롭히는것은, 내가 무엇에 어울릴까, 내가 어떤 식으로든 쓸모있는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어떻게 지식을 더쌓고 이런저런 주제를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뿐이다. 게다가 고질적인 가난 때문에 이런저런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 어렵고, 온갖 필수품이 내손에는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우울해질 수밖에 없고, 진정한 사람과 우정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것처럼느껴진다. 또 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한 좌절감을 느낄 수 밖에. 사랑이 있어야 할 곳에 파멸만 있는 듯해서 넌더리가 난다. 이렇게 소리치고싶다. 신이여,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22)

  

동생 테오는 절망에 휩싸인 형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형이 알아야 할 건어떤 관점에서도 형 자신을 불쌍히 여길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야. 겉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형이 완성한작품들을 생각해봐. 그런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소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형은 더 이상 뭘바라는거야? 뭔가 훌륭한 것을 창조하는 것이 형의 강렬한 소망 아니었어?이미 그런 그림들을 그려낼 수 있었던 형이 도대체 왜 절망하는 거야? 게다가 이제 곧 더훌륭한 작품을 만들 때가 다시 올텐데 말이야. (중략)우리 희망을 갖기로 해.형의 불행은 분명 끝날 거야.“ (247)  


동생의 말에도 고흐는 끝모를 좌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아무래도 요령있게살아가기에는 내가 너무 현실적이지 못한 것 같다.” 라고 토로하기도 한다.  



"그림을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사람"

고흐는 열등감, 죄책감, 자격지심 등 극도의 피학적 성격을 보인다. 때문에 굳이 그렇게 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너무 큰 고통 속에 빠뜨린다.  마치 고통을 찾아다닌 것처럼 보일 정도다. 나는 이런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었다. 


 '왜 그는 그냥 자신의 삶을 즐길 수 없었던 걸까? 왜 자신이 가진 재능을 맘껏 누리고 표출할 수 없었을까? 만약 외로움, 가족과의 불화 이같은 걸 그대로 놔두고 그냥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면 어땠을까?'  


그러다 고흐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를 찾아보면서, 고흐가 왜 스스로를 패배자로 생각하고, 자신을 괴롭히고 비하하는 패턴을 가질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가지가 원인으로 꼽힌다.


하나는 칼뱅파 목사였던 아버지다. 아버지는 매우 엄격하고 금욕적이었는데, 이것이 고흐가 높은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도록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가 있다.  고흐는 평생 자신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내내 열등감에 시달렸다.

 

또 다른 하나는 죽은 형이다. 고흐에겐 형이 있었다. 그런데 형이 죽고 1년 뒤 같은 날 고흐가 태어났다. 부모는 고흐가 죽은 아이 대신 준 선물이라 생각해서 죽은 형의 이름을 붙여주었고, 자주 형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보지도 못한 형의 존재는 고흐가 태어나면서부터 내내 누르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과 같은 이름이 새겨진 무덤을 보며 자란 고흐에게 슬픔과 우울이 깃드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흐도 말미에 그를 알게 된거 같다. 편지에 이런 말을 한다.


“불평하지 않고 고통을견디고, 반감없이 고통을 직시하는 법을 배우려다 보면 어지럼증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며, 심지어 그 과정에서막연하게나마 희망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삶의 다른 측면에서 고통이 존재해야할 훌륭한 이유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지.” (262)


고흐는 평소 색채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고 ‘색을 탐구’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청색과 노란색을 주로 썼는데, 심리학자에 따르면 청색은 체념과 슬픔을 극복하고, 노란색은 병적인 정서를 표현하고 안정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고흐는 색채를 통해 내면을 드러내고, 감정과 심리적 갈등을 녹여내었다. 이처럼 그가 가졌던 고뇌가,  화려한 색채와 강렬한 붓터치로 자신만의 독자적 예술세계를 구축하는데 일조했다고 생각하니..... 역시 삶은 아이러니다.

해바라기. 1888

 결국 그는 말년에 신경쇠약으로 프로방스의 셍레미에 있는 한 요양원에 들어갔다. 그 즈음 그의 작품은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지만, 고흐는 계속된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림이 자신을 치료해준다고 믿어서, 정신병원에서 지내는 짧은 기간동안 무려 146점의 그림을 그려낸다.  이때 그의 작품 <붉은 포도밭>이 400프랑에 팔렸는데, 평생에 유일하게 팔린 유화였다.


고흐가 생전에 팔았던 유일한 그림 <붉은 포도밭>
 "저는 다른 무엇보다제 일에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비록 그림 그리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이해받지 못하는 일 중 하나이지만, 저에게는 과거와현재를 이어주는 유일한 고리거든요."(어머니에게 보내는편지 중, 298)


말기 편지에 가서는 고흐는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며, 더 이상 견딜수 없다는 표현을 자주 한다. 결국 고흐는 1890년 7월 29일 스스로 총탄을 쏘았다. 반 고흐가 자살했다는 주장에는 이견이 있다. 화가가 자신의 몸에 그렇게 총을 가까이 겨냥하기도 어렵고 손에 그을음이 없다는 점, 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타살의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아무튼 그는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여관까지 돌아왔고, 죽고싶다며 치료를 거부했다. 그리고 동생 테오에게 이렇게 말했다.


“슬픔은 영원하다.”


고흐는 동생의 품에 안긴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 날 밤 숨을 거두었다. 동생 테오도 그로부터 1년 뒤, 건강악화로 33살의 나이에 세상을 뜬다.

고흐와 테오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 (1890년 7월) 고흐가 남긴 마지막 작품. 누렇게 익은 밀밭 위로 까마귀떼가 날아오른다.



"나의 때는 반드시 온다"


고흐가 생전에 판 그림은 단 한 점.

(유화가 한 점이며, 실제로는 열두 점의 스케치를 그려서 판 적이 있다.) 

때문에 고흐는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실패했다고 여겼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도 같다"고 하면서도 “내 직업이란 게 더럽고 힘든, 그림 그리는 일 아니냐. 스스로 원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겠지.”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고흐는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데에 대한 절망과 좌절 속에서 생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된다고 여겼고,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미친 듯한 열정으로 그림을 그렸고, 죽어서 그는 원하는 모든 것을 얻었다.


나는 고흐를 보면서, 베토벤의 일화를 떠올렸다. 베토벤은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고 난청까지 오자 깊은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수도원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수사는 베토벤의 이야기를 듣더니 유리구슬이 든 상자를 꺼내왔다. 그리고 구슬을 꺼내보라고 이야기했다. 베토벤이 2번 연속 검은색 구슬을 꺼내자 이렇게 말했다. 


"상자에는 열개의 구슬이 있다네. 여덟개는 검은 색이고, 두 개는 흰색이지. 검은색은 불행과 고통을, 흰색은 행운과 희망을 의미한다네. 어떤 사람은 흰 구슬을 먼저 뽑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네처럼 연속으로 검은 구슬을 뽑기도 하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직 구슬이 남아있고, 그 속에 분명히 흰 구슬이 있다는 사실이네."  


인생에는 행복과 불행의 총량이 있다는 이야기다. 열심히 노력해서 그 결실을 빨리 맺는 사람도 있지만, 그를 아주 뒤늦게 맺는 사람도 있다. 고흐의 경우, 그 때는 조금 늦게 왔다. 

별이 빛나는 밤에

고흐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별이 빛나는 밤에>은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라내고 정신병원에서 그렸던 그림이다.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 좋은 반응을 끌어내지 못했고, 고흐 자신도 그 작품은 '실패'라고 말했다. 하지만 1941년부터 이 작품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상시전시 되었고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 되었다. 1973년에는 모국 네델란드에 반 고흐 미술관이 설립되기에 이르고, 고흐는 서양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의 때는 조금 늦었지만, 결국 왔다. 자신의 길을 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고흐가 큰 위로가 되어줄 거락 믿는다.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을 좌절하지 않고 재미있게 갈 수 있다면 두려울 게 없다. 진인사대천명. 우리는 우리가 할 바를 할 뿐이고, 나머진, 하늘이 대신 해 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때는 반드시 온다.



<참조>

책 <반 고흐, 영혼의 편지>

빈센트 반고흐의 DVD

고흐: 화려한 색채로 심리적 불안을 치유한 네덜란드의 가장 위대한 화가

고흐의 그림들

매거진의 이전글 거북이가 이긴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