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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글리 Oct 21. 2022

바뀐 건 없다, 단지

feat. 영화 <미스리틀션샤인> 첫번째 이야기


콩가루가족의 로드무비, 미스리틀선샤인


가끔  번씩 찾아보는 영화가   있습니다.  중에서 2006년에 개봉한 <미스 리틀 션샤인>이라는 미국영화가 있습니다. 당시 "올해 선댄스 영화제 최고의 영화" 극찬받으며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죠. 보는 것만으로 기분 좋아지는 영화인데, 그렇다고 멋진 사람들이 나오는  아닙니다. 사실 완전 콩가루 집안이 등장합니다.


헤로인 중독의 할아버지, 성공학을 가르치지만 정작 자신은 파산위기에 놓인 아빠, 가족 식사로 몇주째 패스트푸트 치킨을 내놓는 엄마, 얼마전 자살시도한 게이 외삼촌, 파일럿을 꿈꾸며 묵언수행중인 아들, 미인대회를 꿈꾸는 통통한 딸로 구성된 가족이죠. 하나같이 정상의 범주에서는 조금 벗어나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콩가루 가족이 어린 딸의 어린이 미인대회 참가를 위해 뭉칩니다. 낡은 밴을 타고 여행을 떠나며 다양한 일들을 겪는데, 그 과정이  배꼽 잡을 만큼 웃기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를 다시 돌아보게 되는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다 낡아빠진 승합차를 타고 출발한 가족들




삼촌과 조카의 대화; 힘겨웠던 시절이 가장 큰 배움


재밌는 장면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인상깊었던 삼촌과 조카가 나누는 대화를 소개합니다. 좀더 자세히 배경 설명을 하자면, 조카는 고등학생으로 오랫동안 전투기 조종사가 되길 바라며 체력단련은 물론 묵언수행까지 하며 열심히 준비해왔는데요. 좀전에 자신이 색맹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엄청난 좌절감에 빠집니다. 또 삼촌은 자칭 전미 최고의 ‘프루스트 학자’인데, 얼마 전 동성 연인에게 차여 자살시도를 벌여 정신병원에 입원한 전력이 있죠.


좌절한 조카가  너무 힘들다며 18살때까지 잠만 잤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삼촌이 대뜸 프루스트를 아냐며 이런 말을 합니다.   


“프루스트는 프랑스 작가란다. 완벽한 패배자지. 진짜 직업을 가져본 적 없고 짝사랑만 하고 동성애자였어. 말년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힘겨웠던 시절들이 삶에서 가장 좋았던 시기라고 했단다. 그게 자신을 만들었으니까. 

행복했던 시절에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었대. 그러니까 18살까지 잠만 잔다면 얼마나 소중한 경험들을 놓치게 될지 상상해봐. 고등학교? 삶에서 가장 고민이 많은 때란다. 그보다 고통스러운 때는 없을거야. ”


가끔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때, 이 시간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도 그런 적 있으신가요? 저는 고등학교때와 30대 초반의 몇 년이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눈을 감았다 뜨면 이 시간이 그냥 통째로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었죠.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프루스트의 말대로 가장 힘겨웠던 시절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준 가장 탄탄한 기반이 되어주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고통과 좌절의 시간을 넘기기 위해 몸부림치며 해온 것들이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의 기반이 되었고 제 철학의 바탕이 되었으니 말이죠.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지만 고마움은 많습니다. 그 시간을 눈 감고 지나오지 않은 것에, 그 시간에 제가 쌓을 수 있었던 경험에 대해서요.




바뀐 건 없어, 단지


하지만 무작정 버틴다고 상황이 좋아질까요? 힘겨운 시간을 견딘다고, 그 고통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앞으로 더 나아진다는 걸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좋은 답이 있습니다. <루이>라는 미국 시트콤에 나왔던 대사인데요. 홧김에 일을 그만둔 한 젊은 코미디언이 60대 선배 코미디언을 만납니다. 상황이 하도 거지같아서 그만두었다고 하자 선배는 그래도 무조건 버티라고 조언합니다. "버티면 언젠가 상황이 좋아질까요?" 라는 후배의 물음에 선배가 이렇게 답합니다.  


"상황이 좋아질거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그렇지는 않을거야.

대신 네가 더 나아질거야."


사실 지금이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상황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분명한 건 그 시간을 지나며 제가 달라졌다는 겁니다. 이제는 어떤 일을 겪더라도 이전만큼 좌절하거나 힘겨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맷집이 많이 생긴 모양입니다.


힘겨운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는 프루스트 말과

상황은 좋아지지 않지만 대신 네가 좋아질거라는 노장선배의 말이 계속 맴돕니다.

마지막으로 프루스트의 말을 전하며 마무리합니다.


"바뀐 것은 없다.
단지 내가 달라졌을 뿐이다.
내가 달라짐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 좋은 시간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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