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_03
1. 한국으로 갈 결심
그러던 어느 날 한국으로 간 자식들이 연락을 해왔다. 한국으로 오라는 거였다. 그 당시는 2007년 이었고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 바로 전이었다. 그 당시 중국은 올림픽을 대비하여 호구조사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단속이 거세지다 보니 가짜호구를 미처 만들지 못했던 나는 자칫 잘못하면 또 북송될 위험이 있었다. 순흥치와 멀어지는 것은 아쉬웠지만 명숙이가 북송된 마당에 나 까지 감옥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으로 갈 결심을 했다. 그 당시 나는 북한에 있는 친척들과 줄곧 연락하며 지냈는데 내가 한국으로 갈 결심을 하였다 전하자 북한에 있던 시누이가 자신의 딸(숙희, 19세)을 함께 한국으로 보내줄 수 없겠냐고 요청해왔다. 그 때가 2007년 8월 22일 이었다.
먼저 조카 숙희를 만나야 했다.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별이 엄마라는 사람이 브로커로 나섰다. 중국 장백현이 접선장소였다. 나는 운전수를 따라 구석진 곳에 자리한 아파트로 들어섰다. 그 곳에는 노인 몇이 있었고 그 옆에는 시누이가 있었다. 시누이는 나를 보자마자 무릎을 꿇고 울기 시작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시누이 옆에 있던 숙희도 울기 시작했다. 무슨 사정인지, 어떤 마음일지 알 수 있었다. 나도 나와 내 딸을 도와줄 누군가를 필요로 했었으니까. 삽시간에 주변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한바탕 울음바다와 이야기꽃이 지나가고 시누이는 숙희를 맡기고 곧장 자리를 떠났다. 마음을 진정하고 숙희 손을 잡고 나도 일어서려는데 별이 엄마가 들어와 나를 붙잡았다. 브로커 비용을 내라는 것이었다. 시누이에게 받지 않았냐고 물으려 하다 그 집 사정을 뻔히 알고 있기도 하고, 무릇 브로커란 돈을 받고도 받지 않았다고 하거나 양쪽 모두에게서 받으려 하는 성질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기도 하였으니 잠자코 있었다. 이전과 달리 나는 순흥치와 살며 살림이 어느 정도 폈던 터라 브로커 비용이 아주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다. 별이 엄마는 내게 2만원을 달라고 요구하였다. 깎아서 1만 3천원 값을 치른 뒤 나는 숙희 손을 잡고 떠났다. 협상과정에서 별이 엄마는 숙희를 돈 많은 중국남자에게 팔면 어떻겠냐는 말을 하였는데 안 될 말이었다. 인신매매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나는 차라리 내가 돈을 더 내겠다고 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값을 치르고 나서던 중 숙희는 이런 말을 하였다.
“외숙모, 혹시 제 남자친구도 같이 가도 돼요?”
말을 듣자마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게 무슨 말인가. 나 혼자 한국으로 갈 준비를 하다 조카까지 데리고 가게 되었는데, 이제는 조카가 제 남자친구까지 데리고 가자고 말을 하다니. 황당했지만 우선 무슨 사정인지 들어는 봐야겠다 싶어 잠자코 있었다. 듣자 하니, 숙희에게는 제 엄마 몰래 결혼 약속까지 한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숙희가 한국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둘이 이별을 하니 마니 애간장이 타더라는 거였다. 그 남자친구의 이름은 박상일 이었는데 지금 연락만 하면 바로 중국으로 올 수 있다는 거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한국으로 가는 무리에 사내라고는 어린 손자 하나(성운, 4세) 뿐이었다.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남자 성인이 한 명 있어도 괜찮겠다 싶어 승낙을 했다.
*구술사의 신변보호를 위해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를 가상의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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