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_한국으
3. 한국으로 가는 여정의 시작
나와 세 아이가 무사히 한국으로 가야했다. 나는 브로커와 함께 한국행 계획을 세웠다.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아이들, 조카와 함께 버스를 타고 베이징으로 가서 천진, 귀양(贵阳: 중국 구이양)을 지나 곤명(昆明: 중국 쿤밍)을 거쳐 태국과 맞닿은 국경까지 간 후, 숲을 헤치고 태국으로 들어가 태국 소재 한국 대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하는 경로였다.
나는 아이들과 조카의 손을 잡고 베이징을 거쳐 천진까지 갔다. 천진에 내리니 어떤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과 택시를 타고 얼마 안가서 중간 브로커의 집에 도착하였다. 중간 브로커의 집은 2층 아파트였는데 양씨 성의 한국 사장이 주인인 곳이었다.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이미 우리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몇 있었다. 모두가 한국행을 원하는 사람들이었다. 인원이 어느 정도 모이면 한꺼번에 출발하는 구조였다. 함께 길을 떠나는 인원이 많아지니 퍽 든든하였다. 박상일에게 의지하려 하지 않았어도 될 일이었다. 인원이 모두 찼으니 이튿날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에 들었다. 다음날, 새로 맺어진 우리 일행들은 오후 4시 귀양행 기차에 올랐다. 또 다른 시작이었다.
베이징에서 떠나서 귀양이란 곳에까지 온 후 우리는 저녁밥을 먹고 또다시 곤명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 뒤로 우리는 3일간을 기차 안에서 지냈다. 기차에서 내려 브로커 일을 하는 또 다른 모르는 이의 집에서 하룻밤 보냈다. 그 다음날은 택시를 타고 배로 갈아타고 한참을 이동하여 밤 11시에 여느 한 시골에 내렸다. 그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서 또 다시 택시-배-배 순으로 갈아탔다. 이렇게 정신없이 이동한 후에는 하염없는 기다림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그 지역에서 우리를 데리고 갈 사람이 나와 있어야 했는데 시간이 잘 맞지 않는 경우가 간혹 있었기 때문이다. 따로 연락할 수단도 마땅치 않은 처지에 우리가 택할 것은 하염없는 기다림뿐이었다. 투정은 사치일 뿐이었다. 정신없이 이동을 하든 말든 연락이 오든 말든 불평불만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에게도 잡히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기 때문이다.
이 날은 다행히도 두어 시간만 기다렸는데도 연락이 왔다. 길이 험해서 못가니 특정 지역으로 우리가 알아서 이동해 오라는 말이었다. 그들은 길이 험해서 못 간다는 길을 우리는 살기 위해 죽자 살자 넘어야 했다. 모르는 길을 도망자 신세에 찾아가자니 두려움이 앞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일행은 개중에 길눈이 밝은이가 있어 요행히 길을 찾아 택시를 잡아타고 브로커가 일러준 장소로 이동했다. 도착한 곳에는 사람 집인지 짐승 우리인지 분간이 안가는 집이 한 채 있었다. 그 안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동 중인 사람 몇이 있었다. 브로커의 주선으로 우리 가족은 낯선 이들과 함께 밤을 보내었다. 다음날 새벽 3시, 우리는 또다시 낯선 이들과 동행이 되어 또 다시 택시를 타고 어느 한 마을로 이동했고, 거기서 쪽배를 타고 산기슭으로 갔다. 기차, 배, 산길 정신없이 이동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계속 이리저리 이동을 하다 보니 힘에 부쳤다. 산길을 걷는데 자빠지기 일쑤였다. 긴 걸음 끝에 나온 보트를 타고 우리는 국경을 건넜다. 보트를 타고 내린 곳은 중국을 벗어난 태국 어느 곳 이었다. 태국의 어느 한 기슭에서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큰 도로로 나갔다. 태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전에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태국 사람들과 말이 도통 통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우리를 안내했던 브로커는 반곡이라는 곳 까지 버스를 타고 가라 일렀더랬다. 함께 온 낯선 이들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이가 있어 영어로 말을 걸어보았지만 통하질 않았다. 손짓 발짓도 통하지 않았다. 이를 어찌하나 발만 동동 구르던 중 태국 경찰이 다가왔다. 등골이 오싹했지만 이제와 도망가기도 늦었던 터였다. 그런데 경찰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듯 몸짓으로 우리들에게 차에 타라 말했다. 그렇게 이동한 경찰차는 으슥한 곳에 멈춰 섰다. 경찰은 영어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돈 5000원(현재 한국 돈으로 약 15만원)을 달라는 거였다. 우리 일행들이 모두 10명 쯤 되었는데 그들 모두의 몫이 5000원 이라는 계산이었다. 별 수가 있겠는가. 경찰과 틀어지면 갈 곳은 북한뿐이었다. 우리가 잠자코 돈을 내자 경찰들은 그 돈을 통행세쯤으로 생각한 것인지 우리를 반곡으로 가는 버스가 있는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한시름 놓은 우리들은 경찰이 내려준 정류장에서 또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던 중 다시금 단속을 받았는데 아쉽게도 그 경찰들은 뇌물이 통하질 않았었다. 경찰서에서 8일간 있었다. 다만 북송되지 않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경찰서에서 나온 그 이튿날 새벽 6시. 드디어 우리는 이민국에 도착했다. 떠나온 여정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하나하나 기록은 하였으나 다시금 읽으면서도 대체 어디를 어떻게 가고 어딜 어떻게 내린 건지 잘 정리되지는 않는다. 밀입국을 한다는 건, 불법으로 떠나온다는 건 이렇듯 정신없고 오로지 생존만을 생각해야 하는 일인 터이다. 이런 삶을 살아온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구술사의 신변보호를 위해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를 가상의 것으로 대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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