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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적인 하루 Feb 20. 2020

005. 치마의 몰락

그곳에 두고 온 것들




"이걸 입고 다녔다니"

설날, 본가인 대구에 내려간 나는 옷장을 열고 탄식을 뱉었다. 옷장엔 서울까지 들고 가지 않은, 추억, 혹은 정 때문에 그저 방치해둔 옷들이 한가득이었다. 그 많은 미니스커트를 처분했는데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들을 집어 들었다. 그중 검정 네오플렌 미니 스커트는 대학생 때 교복처럼 입고 다녔던 치마였다. 무슨 미련이 남아 버리지 않았을까. 길게 생각하지 않고 종이 쇼핑백에 넣었다. 이제 내 옷장엔 그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나는 입고, 신고, 손에 드는 것들을 정말로 애정 한다. 보통 패션에 관심이 많다거나, 좋다고들 하는데 왠지 그 말은 조금 낯간지러워 내식대로 적어본 말이다. 스무 해 넘게 그런 것들을 애정 해온 만큼 그에 대한 취향도 확실한 편이며 좋아하는 브랜드도 확실하고 좋고, 싫어하는 스타일도 확실하다. 매년 취향이 조금씩 바뀌어 왔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변화는 대학교를 졸업하면서 나타났다. 그건 바로, 내 옷장의 치마와 바지의 판도가 뒤바뀐 것이었다.


 나는 유치원 때부터 자타가 공인하는 치마 러버 (치마 lover)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러니 중, 고등학교 오랜 교복 생활을 청산하고 선택한 아이템이 치마인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랜 치마 사랑이 대학생 때 한 번 더 불타오른 이유는 더 있었다. 당시 나는 극한의 다이어트에 성공한 직후였고 신체 중 가장 드러내고 싶은 부위가 다리였다.(얼마 안가 요요가 오긴 했지만 ) 교복 치마를 줄여도 만족하지 못했던 욕구를 다양한 종류의 짧은 치마들로 해소했다. 그렇게 내 옷장엔 청바지 하나, 체육복 바지 하나, 검정 슬랙스 하나를 제외하고 모두 치마로 가득 채워졌다. 무려 4년 동안이나. 


한겨울에도 (1) 야스와 네오플랜 소재의 검정 테니스 스커트, 혹은 청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미니스커트는 특히나 (2) 검 야스와 함께할 때 빛을 발했는데 다리가 더 얇아 보였고 별칭처럼 조금 야해 보였다. 나는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겨우내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에 '다리가 썰리는 거 같아!'라고 다소 과격하게 외치면서도 줄기차게 유지했던 스타일이었다. 누군가 '너무 불편하지 않아?'라고 물은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옷을 편하려고 입냐?' 하고 반문했었다. 확실히, 그때의 나는 편한 옷을 추구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이렇게 치마 외길 인생을 택했던 내가 그 많던 치마를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치마가 제한하는 어떤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발표하려 일어서면서 치마가 말리진 않았는지 속옷이 보이진 않는지 뒤를 한번 돌아보는 것, 계단을 오르내릴 때 뒤를 계속 의식하는 것, 치마가 말려 올라갈까 봐 무거운 노트북을 백팩에 넣지 못하고 한 손에 이고 핸드백을 들 었던 것들, 지각을 해도 종종걸음으로 걸었던 것들, 혹시 모를 불상사를 위해 (바람에 치 마가 뒤집힌다거나, 넘어지거나 하는 ) 언제나 긴장을 해야 했던 것들, 속옷이 보일까 봐 속바지를 입었지만, 속바지가 보일까 또다시 걱정을 해야 했던 것들. 그것들은 나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제한했고, 그것은 내 태도로 이어졌다. 손을 들거나 앞장서 말하기를 점점 꺼리게 됐다. 짧은 치마 아래로 보이는 다리에 신경을 곤두서고 굵어 보이진 않은지 사진을 찍어 확인하고 거울에 비쳐 확인했다. 치마가 내 모든 생각과 행동에 변화를 줬다고는 할 순 없지만, 치마를 고집하면서,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것들에 신경과, 시간을 쓴다는 것은 분명했다. 


입고 성큼성큼 걷고, 씽씽 달릴 수 있는 옷

그게 전부였다. 언제인지도 기억 못 하는 어느 날부터 나는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었다. 내가 생각하는 옷의 가치가 '외적'인 요소에서 '실용성'으로 조금 옮겨졌다. 그 옷을 입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지, 편히 앉을 수 있는지, 옷을 입고 있는 동안 나보다 옷에 신경을 더 쓰지 않아도 되는지가 중요해졌다. 지금 내 옷장의 지분은 바지가 월등하게 우세하고 있다. 특히 넉넉한 핏의 와이드 팬츠나 슬랙스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중 COS에서 구매한 채도가 낮은 오렌지색의 와이드 팬츠를 입을 때면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들뜬다. 그 바지를 입으면 걸음의 보폭이 한 결 커진다. 성큼성큼 걸을 때 더 멋진 옷이기 때문이다. 만년 내 옷장의 주인공이었던 미니스커트는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예상컨대 그들의 복귀는 어려울 것 같다.















 (1) 야스 : 살이 비치는 검정 스타킹, 야한 스타킹의 준말로 살이 많이 비치는 얇은 검정스타킹을 말하는 속어.

 (2) 검야스 : 검정 야한 스타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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