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억 챙긴 주가조작, 800억 철퇴가 남긴 것

by TJ

한국 자본시장에서 또 한 번 주가조작 사건이 터졌다. ‘슈퍼리치’라 불린 투자자가 1천억 원에 달하는 자금을 대출로 마련해 1년 9개월 동안 특정 종목의 주가를 두 배 가까이 끌어올리고, 그 과정에서 400억 원이 넘는 차익을 챙겼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수만 건에 달하는 허수 주문과 가짜 매매가 동원된 전형적 ‘시세조종’ 방식이었다. 정부는 이 사건을 “패가망신 1호”로 규정하며 무려 800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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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 같은 사건이 결코 ‘한 사람의 일탈’로만 볼 수 없다는 데 있다. 자산운용사 직원, 금융 전문가까지 가담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는 점에서, 이미 금융시장 내부의 구멍이 얼마나 크고 오래 방치되었는지를 보여준다. 2000년대 초반 ‘엔론 사태’ 이후 미국 증권시장은 내부 통제와 회계 투명성 강화를 위해 사베인스-옥슬리법(SOX 법) 같은 강력한 규제를 도입했다. 일본 역시 닛산·올림푸스 회계 스캔들 이후 금융청의 감독 권한을 확대하며 신뢰 회복에 나섰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비슷한 사건이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에서 뼈아픈 자기반성이 필요하다.


이번에 내려진 800억 원 과징금은 금액만 놓고 보면 사상 최대 규모다. 그러나 부당이득의 두 배라는 단순 공식만으로 과연 시장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주가조작 세력은 언제든 새로운 수법을 고안할 수 있고, 사후 처벌만으로는 ‘억제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사전 예방 시스템이다. 차명 계좌 거래를 원천적으로 막고, 금융사가 의심 거래를 실시간 탐지할 수 있는 기술적 장치와 인력을 확충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한국 주식시장의 ‘투자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오랜 기간 한국 증시는 ‘박스권 장세’에 갇혀 왔다. 지수가 일정 범위 안에서 오르내리기만 하다 보니 투자자들은 장기 투자보다 단기 시세차익에 매달리게 되었고, 이 틈을 노린 세력들은 허위 정보와 시세조종으로 손쉽게 개인 투자자를 희생양 삼았다. 선진국 시장이 기업의 내재가치와 장기 성장을 중심으로 투자 문화를 형성해 온 것과 달리, 한국 시장은 여전히 ‘단타와 테마주’가 지배한다. 이 왜곡된 투자 행태가 주가조작 세력의 비옥한 토양이 되고 있는 셈이다.

주가조작 사건이 터질 때마다 시장은 출렁이고, 개미 투자자들은 막대한 피해를 떠안는다. 정부가 ‘불공정거래 4년 더 조사’라는 구호를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구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투자자가 믿을 수 있는 시장”을 만드는 일이다. 신뢰 없는 자본시장은 성장도, 혁신도 불가능하다.


다행인 것은 이번 정부가 단순한 처벌을 넘어, 제도 개선과 상시 감시 체계를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징금 부과와 같은 사후적 조치뿐 아니라, 빅데이터 기반 이상 거래 감지 시스템, 금융당국과 거래소의 실시간 공조,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투자 교육 강화까지 함께 추진된다면 이번 사건은 오히려 한국 자본시장의 체질 개선을 앞당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불신의 상처가 깊을수록, 치유를 위한 제도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번 경험해 왔다. 이번 철퇴가 단순한 응징에 그치지 않고, 박스권에 갇힌 한국 증시와 ‘단타 문화’를 바꾸는 진짜 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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