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피리어드>, 창작과 성장에 대하여

자신 없는 나라서, 여기까지 왔다

by 쌈무

애니메이션을 보고 감상평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작품이 〈블루 피리어드〉였다. 처음엔 가볍게 틀었다가, 어느 순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미술 입시를 다루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다 보고 나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남는다. 이 작품이 진짜로 다루고 있는 것은 미술이 아니라, 창작과 성장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 나가는 과정이다.


작품의 제목 〈블루 피리어드〉는 피카소의 청색 시대(Blue Period, 1901~1904)에서 가져온 말이다. 친구의 죽음과 극심한 가난 속에서 피카소는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 찬 그림들을 그렸다. 그 시절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자기다운 예술이 탄생한 시간이기도 했다. 이 작품이 그 이름을 빌려온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가장 자신 없고 흔들리는 시간이, 사실은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시간이라는 것.


주인공 야구치 야토라는 공부도 적당히 잘하고 친구들과도 잘 지내는 평범한 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림을 통해 생전 처음으로 '표현하는 기쁨'을 경험한다. 그 순간 이후 그는 미술이라는 낯선 세계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문제는 그가 그 세계에서 완전한 초보라는 사실이다. 주변에는 이미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온 학생들이 있고, 미대 입시는 결코 만만한 도전이 아니다. 야토라는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와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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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이 특별하게 느껴진 이유는, 주인공의 성장이 지나치게 극적이거나 낭만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창작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불안과 혼란, 자기 의심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장면들은 그림 이야기인데도 묘하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작품 속에서 기억에 남는 말이 여럿 있었다.


선생님은 야토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대응력이야. 너한테 부족한 건 멋대로 구는 힘이야." 그림을 그리는 일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창작자는 매번 새로운 문제 앞에 서게 된다. 그때 필요한 건 완벽한 기술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생각하고 반응하는 힘이다. 이 말이 와닿은 건, 결국 창작뿐 아니라 많은 상황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그 '멋대로 구는 힘'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이런 말도 나온다. "성실함이 인정받는 건 의무교육까지야." 꽤 냉정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창작의 세계에서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만의 시선과 선택, 그리고 표현이 있어야 한다. 이 점을 받아들인 야토라는 조금 달라진 태도로 이렇게 말한다. "과제는 잘 씹어서 내 것으로 소화하면 되는 거야. 내 그림은 내가 원하는 대로 그리자." 배운 것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그것이 창작이라는 말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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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오래 남은 말이 있다. "너무 많은 무기를 쓰면 잘해도 애매한 그림이 돼. 선택하지 않는다는 선택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다 잘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결국 창작자는 무언가를 선택하면서 동시에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결정하는 그 과정에서, 비로소 자기만의 표현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 작품은 그림을 잘 그리는 법보다,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이야기한다. 야토라는 여러 번 자신의 한계에 부딪히고, 그때마다 다시 붓을 든다. 창작이란 결국 자신의 약함과 강함을 마주하면서도 계속 그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 말도 오래 마음에 남았다. "나답지 않은 걸 해 보지 않으면 나의 세계는 넓어지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시도는 불편하고 실패할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통해서만 이전과 다른 자신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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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오래 남은 문장이 있다.


"자신이라고는 없는 내가 될 수 있을 뿐. 하지만 자신 없는 나라서 여기까지 성장했다고 믿고 싶어."


우리는 완벽한 자신감을 가진 상태로 무언가를 시작하지 않는다. 대부분은 불안하고 확신이 없는 채로 시작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 불안이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시도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 없음이 오히려 성장의 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블루 피리어드〉는 단순한 미술 애니메이션이 아니다. 이 작품은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사람, 아직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 모두에게 오래 남는 이야기다. 창작이란 완성된 재능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자신을 조금씩 발견해 나가는 과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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