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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원 Sep 18. 2019

버리지 못하는 마음

 올 추석, 우리 집은 한바탕 난리였다. 홀로 사시는 할머니 댁의 대청소 때문이었다. 자식들이 그렇게 말리고 말려도 여든이 넘은 나이에 소일거리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뒷산에 있는 밭뙈기에 이것저것 심으며 지내시는 할머니의 집은 도저히 사람 사는 곳이라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난장판이었다. 자식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아 썩고 있는 온갖 채소들, 다 쓰지 못한 생필품들, 혼자 다 드시지도 못하면서 여기저기서 받아오신 음식들은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래도 할머니 댁과 거리가 가까워서 아버지가 틈틈이 들려 치우심에도 불구하고 금세 원상 복구되고 오히려 심각해져만 가서 추석에 온 가족이 동원되었다. 청소할 때마다 놀랍고 새롭다. 이번엔 'BRAVO 2005'가 적힌 포장지 안에 든 휴지 10롤이 발견되었다. 이미 먼지인지 휴지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휴지로써 기능을 다한 듯 보였지만 할머니는 이것들을 15년 동안 꽁꽁 숨겨두셨다. 그리곤 먹을 수 있다며, 버릴 것이 없다며 한사코 청소를 거부하시던 할머니는 끝내 자신이 도토리묵을 하려고 아껴둔 도토리 가루를 내다 버린 아들에게 역정을 내셨다.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골목을 내려가는 아들과 손자 뒤를 잘못 버린 건 없나 하고 구부러진 허리에 손과 아쉬움을 얹은 채 조급히 따라 내려오시는 할머니를 보자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할머니를 이해 못하지는 않았다. 전쟁과 피난을 겪은 그 세대에게 음식이란 곧 삶이었다. 내 새끼들은 한 없이 말라 보이고 먹여도 먹여도 부족해 보이는 건 나의 할머니뿐 아니라 대부분의 할머니들의 마음이리라. 여전히 할머니께서 나에게 건네는 아침인사가 "조반은 먹었니?"인 것은 음식과 먹음이 할머니께 얼마나 큰 존재인지 고집스럽고도 무겁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청소가 끝난 후, 시장에서 값싼 가격에 구할 수 있는 메밀 한 봉지가 없어졌다며 하늘이라도 무너진 듯 걱정하시는 할머니를 'BRAVO 2005 휴지'보다 10년 좀 더 산 내가 온전히 이해하기엔 무리였다. 무엇이든 버려야 할 땐 버려야 했다. 모두 쓸모 있는 시간과 상태가 있고, 지나면 아쉽더라도 버리는 게 맞다. 아닌 걸 알면서도 끌어안고 가는 건 욕심일 것이다. 할머니도 모르시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할머니 성화에 못 이겨 우리가 버리지 않았더라도 그것들은 먹지도 쓰지도 못할 것이란 걸.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우연히 본 정동수의 단편소설 <호미>가 생각난다. 소설 내에선 전통적 삶으로 대표되는 시어머니와 현대적 삶으로 대표되는 며느리의 첨예한 대립,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아들이자 남편인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이 묘사된다. 시장에 널린 게 된장이라며 말리는 며느리를 무시하고 자고로 그 집의 가풍은 장맛에서 나오는 거라며 도회지 한가운데 공터에 벽돌장으로 아궁이를 만들어 커다란 양은솥에 콩을 삶고 집안에서 메주를 띄우는 시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그 메주 냄새가 몸에 밴 채 회사를 간 주인공을 바라보는 젊은 사원들의 곱지 않은 시선들은 전통과 현대의 가치관 사이 메꿔질 수 없는 골이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지하실에 있던 호미를 학교 폐품 모으기 행사에 가져다 낸 초등학생 손주를 차마 야단치지는 못하고 기어코 다시 학교로 가 호미를 찾아와 아직 쓸만하다며 녹슬지 않게 기름을 발라놔야 한다고 말하는 주인공 어머니의 모습은 우악스러울 정도로 고집불통이다. 그러나 그 호미는 수십 년 전 어린 아들을 먹이고 키우기 위해 밭을 매던 호미였고 그녀에게 호미는 단순히 밭매는 도구가 아니라 어쩌면 그녀가 일궈낸 삶 전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호미를 다시 폐품 수거장에서 가져온 마음도, 세상을 뜨기 전 상자에 넣어 끈으로 동여매 보관해 놓은 마음도 결국엔 이해가 된다. 전통적 가치관인 메주와 그녀의 삶 전체였던 호미는 차마 버리지 못한, 버릴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할머니도 마찬가지였을까. 메밀도 도토리 가루도 하다못해 먹지 못할 정도로 상한 이름 모를 그것도 할머니껜 전부 음식이었을까. 더 바랄 것도 없이 하루 세끼 밥 챙겨 먹으면 성공한 하루였던 그 당시 억척스럽게 5남매를 키우던 할머니께 버릴 음식은 없었다. 나도 한번 돌아봤다. 내게 버릴 것은 없는지. 유행이 지나 입지 않는 옷들, 밑창이 다 해져 반질반질해 비 오는 날 이따금씩 미끄덩하는 샌들, 누군가에게 후회되고 죄송스러운 기억들. 모두들 자신에게 쓸모없지만 버리지 못한 물건이나 생각이 적어도 한 가지씩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버리면 그들이 지탱하고 점유해 온 그 시간 혹은 삶까지 버려질 것 같은 두려움에 쓸모없고 어쩔 땐 스스로에게 해가 되었던 그들을 품고 살았다. 우리는 그 쓸모없는 것들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었을까. 아니 어쩌면 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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