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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mz Nov 19. 2018

Farewell.

사카모토 류이치의 LIFE를 영원히 기억하다.




Ryuichi Sakamoto : LIFE, L I F E

그 마지막을,




sakamoto




 진부한 표현이지만, 선택이란 참 신기하다.


 한 번의 선택은 나를 결정지었다. 한 달 전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이날 역시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또 나와는 다른 누군가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렇게 편함과 부러움, 그 사이의 어정쩡한 심정을 지닌 채 애매한 마침표로 하루를 끝맺었을 것이다.


 그리고 2018년 10월 14일, 오후 7시. 나는 반듯한 먹색 재킷을 입고 차가워진 가을 저녁을 물씬 맞으며, 여느 때와는 다른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로부터 딱 한 달 전, 그러니까 내가 작디작은 용기를 내게 된 건 9월 14일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자유롭게 사는듯해 보여도 안정적인 틀이 흔들리게 되면 불안한 습성이 있다. 그런 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크닉piknic의 한 공지, <10/14 farewell party 안내>였다. 즉, 피크닉의 첫 전시를 마감하면서 관객을 초청한 작은 파티를 열겠다는 소식이었다. 이 파티에 참여하기 위한 방법은 다름 아닌 '전시회 리뷰'였고, 'sakamoto'라는 해시태그를 통해 응모할 수 있었다.


 다가올 끝을 미리 인지하는 기분이란 이런 것일까. 마지막을 고하는 말들의 무게에 순간적으로 짓눌렸다. 분명 어둡진 않았지만 오히려 담담하게 풍기는 글의 공기가 마냥 개운하다 느껴지진 않았다. 애초에 가을 즈음이 전시회의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벌써 다가온 가을에 무심한 시간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철거 직전의 전시장을 마지막으로 돌아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 구절에서 나는 멈추어 섰다. 단순히 '마지막', '작별'을 논하는 말보다 '철거'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사라지는 것이다. 조금 더 보완되거나 보수되는 것이 아닌, 없어지는 것이다. 다시 세우더라도 온전한 똑같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별이었다. 생명력이 있는 것도 아닌 터라, 단지 '철거'라는 단어로 냉정히 무너져야 했다.


 전시장의 마지막 그 온기를 꼭 느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나의 온기 또한 한 줌 놓고 싶었다. 사라짐은 차가울 지라도 그 직전은 조금이나마 더 따뜻할 수 있길 바랐다. 이것이 내가 작디작은 용기를 내게 된 연유이다. 누군가는 왜 굳이 용기라는 말을 쓰는지 의아할 것이다. 내가 새로운 상황에 던져진다는 건, 편안한 호흡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호흡이 아닌 다른 호흡을 내쉬기 위해선 불편함을 익혀야 한다. 불편함을 겪는 건 달갑지 않은 일지만, 다른 호흡을 내쉴 줄 알아야 상황에 따른 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니 당연하겠지만, 평소엔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고 마냥 익숙한 흐름을 즐기려 한다. 하지만 낯선 흐름을 타는 것이 인생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낯선 흐름을 타기 위해 불편함을 이겨낸다는 것도 안다. 그렇기에 나도 작디작은, 불편한 용기를 내려하는 것이다. 그로 인한 결과가 내 인생에 단지 미미한 점일 순 있으나, 이들이 모여 긴 음표가 되고 악보가 되길 바라면서.


 거창하게 말하긴 했지만, 일단 하루를 위해 지방에서 서울까지 간다는 것 자체로 나에겐 큰 힘을 요구했다. 그러나 낯선 미래도 격렬하게 원한다면 감수해야 할 불편함이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 수 없는 결과일지라도 일생일대의 가장 빠른 선택을 내렸다. 피크닉 공지를 보았던 그 자리 그대로 일어선 채 응모를 했고, 초조한 기다림의 한 달이 지나 초청받기에 성공했다.




그가 보는 풍경들




 피크닉의 공지엔 '깜짝 손님'의 방문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물론 그들의 서프라이즈 방식에 나는 아주 걸맞았다. 이런 촉에 무던했기 때문에 정말 만남의 순간까지 알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가 오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설마 싶었던 것이다. 그렇다, 마지막을 함께 하기 위해 '사카모토 류이치'님이 당도하셨다. 사실 나중에 함께 한 분들께 들은 이야기지만, 이미 서울 어딘가에서 일찌감치 그의 행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Ryuichi Sakamoto



 그는 직접 작품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설명문 만으로는 알 수 없었을 정말 그의 삶, 'LIFE'가 담긴 것들이었다. 단지 한 순간의 장면일지라도 이와 관련된 사람들, 대화, 추억, 시간, 장소가 온전히 스며들어 있었다. 그야말로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게 아닌가. 그렇게 보면 인생에 있어 절대적인 끝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지금을 최대한 느끼기 위해선, 단지 그의 얼굴과 목소리에 집중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어떤 것을 기억하려 들지 않았다. 감각은 기억하려 하면 할수록, 아득히 멀어지기에. 우리 같은 순간, 함께 했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이번 역시, 그가 보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아직은 만물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데에 서툰 내가, 그의 시선을 빌려오는 것이다. 비와 파동, 빛과 안개, 흙 같은 것들을 또렷이 보기 위해 말이다. 다만, 지난번과의 차이점은 이를 해석하는 바로 '나'일 테다. 저번 기회에선 그가 '소리를 인지하는 방식'에 빠져들었다면, 이번엔 이를 '예술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에 많은 영감을 받았다.

 

 단지 자연을 보는 남다른 감성뿐 아니라 작품으로서 실현시키는 그의 생각이 참 깊다고 느꼈다. 맺고 끊음, 후퇴와 발전, 자연스러움과 인위적임이 어우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반됨을 엮는다는 건,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정신적 소모가 들지 않나.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고뇌하고 만들어내며 시도하고 적용한다. 그렇게 단순히 청각에서 끝내지 않고, 세상의 모든 감각을 어루만진다. 그런 음악가이다. 대단하다는 말 조차 가볍게 느껴질 만큼, 엄숙한 예술가이다.

 

 그런 그에게서 보았던 혹은 들었던 찰나의 것들을 머릿속에 가볍게 스케치했다. 그렇게 둥그스름하고 희미하게 그려진 뭉텅이들을 글로 재정리하여 짧게나마 기록해두었다. 이렇게 글로 다듬는 과정은 이미 지나간 시간에 형태를 부여하는 일이다. 다음은 10개의 그 짧은 기록이다. 이는 순간 번뜩였던 그대로 적어두었기에, 나조차도 나름의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니, 문장에 의미가 없어 보여도 읽는 이에 따른 각자의 의미가 분명 있을 것이다. 




 

 1. 예술에는 어느 정도 생각의 여백을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며, 설명을 줄이던 모습. 

 2. 목욕을 할 때,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다시 욕조에 떨어져 생기는 파동을 좋아한다고 했다.

 3. 비가 내리는 흐름을 반영하여, 실제 세계의 비를 담아냈다. 간간히 보이는 격렬한 파동은 우리 세계에서도 간간히 몰아치는 태풍을 표현했다고. 그는 음악을 넘어선 존재가 아닐까.

 4. 물은 단지 물이 아니다. 구름이 되고 안개가 되고 비가 되고 눈이 된다.

 5. 자신의 음악이 이루어지는 풍경을 담았다. 음악이 만들어지는 공간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미세하게 움직이는 빛을 좋아한다. 어떤 공간에 있는가도 음악에 영향을 주는 것이겠지. 

 6. 영상 음악 감상실 안. 화면이 있는 앞쪽에만 스피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방에 스피커를 놓았다. 그렇게 공간을 가득 채우는 사운드. 그것만 알아두면 된다 했다.

 7. '라이프(LIFE)'라는 오페라의 노래와 영상을 잘게 찢어 30개의 테마를 만들었다. 이는 컴퓨터에 의해 랜덤으로 그 순서가 조합된다. 그럼 구성되는 경우의 수는 백몇 가지. 결국 한 작품을 보더라도 같은 장면을 보게 되는 경우는 없다.

 8. 안개가 잔뜩 낀 수조 구조물은 위의 조합을 반영하여 활자화된 영상을 비춘다. 그러나, 이때의 글자는 안개에 시야가 흐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의도된 일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다.

 9. 피아노의 낮은음은 굵고, 높은음은 가는 줄로 되어 있다. 침수된 피아노의 가는 줄은 모두 끊어져 버렸지만, 낮은음을 이루던 굵은 줄은 왜곡된 음을 지녔을지언정 끊어지진 않았다. 

 10. 악기가 처한 상태를 온전히 바라보고자 했다. 피아노 겉에 묻은 흙과 오염, 때를 닦아내지 않고 그대로 두는 것이다. 비록 자연의 장난에 호되게 당했을 지라도, 왜곡된 음 또한 수리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듣는다.  





 원래 이러한 생각을 스케치하듯 간단하게 적어두었던 건, 후에 이를 바탕으로 세세하게 풀어쓰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 정도 생각의 여백을 남겨두는 것은 중요하므로. 그가 던진 말들을 바라보는 건 마치 음악을 해석하는 일과 같다.


 다만 이렇게 흐르는 그의 말들은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 여러 이정표를 세울 것이다. 실은 삶에 대해 주체성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는 꽤 그를 동경하고 있었다. 아마 그의 저서 <음악으로 자유로워지다(音樂は自由にする)>를 읽고 난 후부터 일 테다. 음악으로 자유를 추구한다는 제목 자체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하루 종일 음악을 끼고 사는 나로서는, 결국 하루 종일이 자유로운 것이 아닐까.


 단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서술했을 뿐인데도, 그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제목과 같이 자유롭게 음악을 만들어 보이지만, 결코 휘둘리지 않는 확고한 무엇인가가 있다. 생각은 뚜렷하나 절대 얕지 않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했다. 넓게 사고하지만, 나직하고 깊게 이해하려 하는 나무 같은 모습은 지금까지도 내 앞에 우뚝 서 있다. 


 이번 전시회와 페어웰 파티에서 두 눈과, 두 귀로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삶의 어느 한 길가에서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던 한 그루의 나무를 드디어 눈앞에서 보았다. 돈이 얼마가 있다한들, 내 멋대로 만들어낼 수도 없는 가장 싱그러운 시간이었다. 어떤 시간이 지나도 결코 시들지 않을, 그런 파릇파릇한 시간 말이다. 


 나는 노력하더라도 그가 보는 풍경을 똑같이 보지 못할 수 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양까지 세세하게 볼 수 있는 그 시선은 타고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잊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 모든 자연에 제각각의 냄새가 있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만물은 모두 자신만의 빛을 지니고,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각자 다른 모습으로 내린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혹여 뒤틀리고 더러워져서 원래와는 다른 소리를 뿜게 되더라도, 틀린 소리는 아닌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계속 듣는다면, 언젠가 그의 시선이 겹치는 날도 올 터이다.

 

 그러기 위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잘게 찢을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자 한다. 여기 지금 서있는 공간을 인지하고, 그곳을 메우는 소리가 가득 풍부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소리가 닿지 않는 어느 한 구석도 없도록. 또한 바랜 빛을 사랑하고, 바뀌어버린 것과 사라진 것들을 애정 어린 손길로 어루만질 것이다. 그렇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싱그러운 그늘을 펼칠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될 수 있길.


 첫 번째 전시에 작별인사를 하는 피크닉에서, 생각한다.




낯선 이들과 안녕(Hello, Goodbye)




 요새는 낯선 이들과 접할 일이 별로 없다.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 떠나는 성격도 아닌 데다,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나에겐 꽤 벅찬 일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피크닉 측에서 이번 파티엔 동반자 출입이 불가함을 알려왔다. 협소한 장소가 그 이유였지만, 어찌 보면 굳이 같이 즐길 사람 없는 나로선 꽤 다행스러운 일이 맞다. 


 게다가 선착순이나 혹은 랜덤 추첨 등이 아니었기에, 참석자들 중 아는 이들끼리 만날 일은 굉장히 드문 경우였다. 물론 처음부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도 계신 것 같았다. 아마 우연히 같이 당첨이 된 지인 관계였거나 혹은 당첨이 된 후 다양한 관계망에서 연결이 된 관계이거나, 일찍 와서 어쩌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말문을 먼저 트게 되셨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참 많은 경우의 수와 우연이 작용한다.


 그런 몇 분을 제외하면, 공통점 하나 빼곤 모르는 이들이 뒤엉켜 있던 장소였다. 공통점 하나는 '피크닉 전시회를 인상 깊게 여겼던, 사카모토 류이치를 사랑하는 사람들'. 물론 사카모토 류이치에 대한 어떤 감정 하나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고서 이 자리까지 오기란 분명 힘든 일이다. 



피크닉(piknic)



 혼자서 새로운 경험을 겪으러 가본 시간은 처음이라, 많이 걱정도 하고 긴장도 했더랬다. 하지만 '동반인 출입 금지'는 그야말로 피크닉의 앞서 나간 통찰력이었다. 억지로 만들어지는 교류나 이어져야 할 관계에 대한 부담 없이, 마지막을 함께 하겠다는 마음만으로 즐기는 일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타인에게 꺼낸 말과 표현, 감정들이 서로 섞여 들면서 잔잔히 사람들은 함께 한다. 


 그럼 전시회의 끝에 더욱 집중하고 뜻을 기리면서도, 사카모토 류이치를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정겨운 대화도 존재하게 된다. 적극적이고 싶은 이는 더욱 적극적이게, 아닌 이들은 조금 먼발치에서 과정을 느낀다. 결국 어떤 방식으로 즐길지는 참석자 개개인의 선택에 따르는 것이다. 앞으로 피크닉이 만들어 갈 파티는 어떤 형식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런 방식이 참 좋았음을 말해두고 싶다. 


 오래간만에 새로운 사람들과 좋은 사람 그리고 좋은 시간을 온전히 나눌 수 있었다. 그 날의 오밀조밀한 공간과 서로의 어제와 내일의 이야기, 저녁이 무르익었던 가을바람까지. 낯설지만 꽤 그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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