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라키 Sep 13. 2024

그 시절의 꿈나무들은 아직 숲을 이루지 못했다.

'시도'와 '도전'의 차이에 대한 고찰

Empiricist [emˈpɪr.ə. sɪst / 경험주의자]

학창 시절, 나는 좌우명을 묻는 물음에 "나는 살면서 할 수 있는 만큼의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경험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고 답하곤 했다. 한참 Carpe diem(Seize the day의 라틴어)이나 YOLO(You Only Live Once의 약자)와 같은 허세 가득한 좌우명들이 설쳐대던 시기였기에, 이런 내 좌우명은 무난히 묻어가는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진심이었다. 뭐든 궁금한 건 한 번은 해봐야 직성이 풀리고 뭐든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해보고 깨닫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경험주의자라는 말은 나를 꼭 맞게 설명하는 단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나는 재미없는 취업 준비를 위한 전공 공부(경영/언론)보다는 뭔가 더 나다운 미래를 꿈꾸며 다양한 경험을 위한 시도들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뿌려진 나의 경험의 씨앗이 발아하여, 한 그루의 꿈나무가 자랐다. 취업 대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은 나에게 "디자이너"라는 꿈으로 피어났다.


??? : 디자인의 'ㄷ'도 안 해봤습니다만....

사실, 내가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는 마치 맑은 해변가에서 벼락을 맞은 것과 같이 내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적어보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림을 시작하게 된 시기에 나는 졸업을 코앞에 두고 있었고, 당장 어느 회사를 목표로 인적성을 준비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지친 도피처인 듯, 혹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꿈을 담고 있는 선물인 듯 나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독한 경험주의자로서, 이 또한 내 인생에 한 획을 그을 엄청난 경험의 서막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나는 과감한 선택을 하였다. 디자인스쿨로 유학을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디자인스쿨 입학을 시도하다

그런데 그림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순수미술이 아니라 왜 디자인스쿨이었냐고?

사실 내가 창작을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가족과 친구들의 응원과 기대였다. 그리고 그 마음에 부응하듯이, 나는 내 작업물들에 마음을 담아 자주 선물을 하곤 했다. 그런데 그림 자체를 선물하다 보니 원본을 보관하지 못한다는 점과 선물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는 점이 딜레마로 다가왔다. 좀 더 효율적인 선물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내가 그린 그림을 가지고 실생활에 사용 가능한 제품을 만들어서 선물을 하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림도 배워본 적 내가 디자인스쿨을 준비할 수 있는 현실은 꽤나 녹록지 않았다. 비전공자들이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유학원은 한 달에 백만 원이 넘었다. 그렇게 몇 달을 준비해야 1년에 한 번 지원이 가능했으며, 이마저도 떨어지면 다음 해로 기회는 넘어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해보지 않으면 훗날 이 시기를 지독하게 후회할 것만 갔았기에 나는 학기를 휴학하고 "일단은 해보기로" 했다.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던 흔적들이다. 꽤나 고민을 열심히 했나보다.  
이정표가 없는 목표는 목표가 아니다.

하지만 미술을 전공하지 않는 나에게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디자인에 접목 시여야 하는 포트폴리오 제작 과정들은 너무나 막막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준비를 하면서 깨닫게 된 사실은 내가 디자인의 어떤 분야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정리가 너무 안되어있다는 사실이었다. 공간디자인인지, 시각디자인인지, 갈피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일단 준비에 뛰어든 성급함이 낳은 결과였다. 그렇게 네덜란드 디자인 스쿨을 준비하고자 했던 시도는 몇달간의 사투 끝에 장렬히 막을 내렸다.


패턴 디자인을 시도하다

그렇게 복학을 하고 이내 졸업을 했다. 취준이라는 악의 구렁텅이에 터덜터덜 발을 내딛으면서도 나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쌓여만 가는 캔버스와 이력서 사이에서 "무얼 하고 살아야 하나"하는 생존에 대한 고민이 계속됐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돈을 벌 수는 없을까? 사실 디자인스쿨을 가지 않아도 제품을 만들 수만 있으면 가능한 꿈같아 보였다.


그때, 한 블로그에 올라온 패턴디자인 클래스에 대한 모집글이 나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패턴 디자인? 마치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쌍둥이 동생을 찾은 듯한 느낌이었다. 어쩌면 내 미래에 이것만큼 잘 녹아들어 갈 수 있는 분야는 없어 보였다.  

나의 첫 패턴 디자인 수업. 너무 재밌었다.

그렇게 버스를 두 번 환승하고 도착한 성북동의 한 디자인 공방에서 패턴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만큼은 취준이라는 가짜 꿈에서 벗어나 내 진짜 꿈에 심폐소생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두 달간의 과정이 끝나고 나니, 나는 다시 허무해졌다. 디자인을 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알게 됐지만, 좀 더 심화적으로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오롯이 내가 혼자 해야 하는 과제였다. 현실에 치여 여유가 없던 시기였기에, 그림과 디자인 쪽으로는 점차 발길이 뜸해지며 다시 아쉬운 시간들이 흘렀다.


아이디어스 입점을 시도하다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다. 입사까지는 2달의 시간이 남아있었던 터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다시금 눅눅해졌던 꿈에 바람이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한정된 시간이기에 지금까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던 것을 실행해보고 싶어졌다. 그러려면 먼저 나의 창작물들의 시장가치(?)를 평가해봐야 했다.


먼저 지금까지 야금야금 만들어 놨던 디자인들로 다양한 샘플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패턴을 입힌 패브릭을 들고 동대문으로 가 직접 이불과 담요 샘플을 만들었다. 소량 제작이 가능한 업체를 통해 후드티에 프린팅을 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제품들을 가지고 아이디어스(온라인 핸드메이드 제품 쇼핑몰)에 입점 신청을 했다.


신기하게도 한 번에 통과가 됐다. 뭔가 인정받은 것 같아 괜히 마음이 설레왔다. 하지만 이곳은 제품을 파는 쇼핑몰이었다. 제품을 만드는 것까지만 생각했던 나에게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주문들은 감당 불가능한 것이었다. 일단 물량 자체도 없을뿐더러, 택배 송부 등의 물류 작업에 대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게 들어오는 주문들을 어물쩍 넘기다가 나는 변변한 거래 한번 제대로 못하고 결국 사회로 도망치듯 뛰쳐나가 입사를 해버렸다.

아이디어스에 입점시켰던 나의 제품들. 꽤나 많은 주문문의가 들어왔었다.


단발성 시도와 장기적 도전의 가치는 다름을 깨닫다.

사실 예술에 대한 나의 꿈은 꽤나 느지막이 발굴된 탓에, 그에 기울어진 노력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단순한 경험으로 치부하기엔 거기에 너무 많은 고민의 시간들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순히 시도”해봤다”해서 언제나 “해를 볼” 수는 없는 법이라는 것을, 나는 경험들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인정하기엔 억울하지만, 나의 여러 시도들은 크고 작은 점들이었다. 그 점들을 이어서 하나의 선을 그어야 장기적인 도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하나의 시도를 실패할 때마다 책장을 넘겨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점을 이어 선이 되고, 선을 맞닿아 면을 만들 시간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꿈을 좇는 경험주의자. 어쩌면 이 문장은 이율배반적인 표현일 수 있다. 꿈을 품은 나무들은 단발적인 경험이 아니라 끊임없는 도전으로  계속해서 물을 줘야 자라난다. 언젠가 나의 나무도 계속해서 자라나 울창한 숲을 이루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대화할 시간에 춤이나 한번 출까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