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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너무 똑같다고 느껴질 때, 모네를 떠올렸다

끌로드 모네 <건초더미>, <선라이즈>, <르왕 대성당>

by Summer
모네가 건초더미를 30번 그렸듯, 나도 같은 하루를 다시 보기로 했다

직장 생활에도 사춘기가 온다는 걸, 요즘 들어 처음 알았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부리나케 준비해 출근하고, ‘일하기 싫다’를 몇 번 되뇌다 보면 어느새 퇴근이다. 가끔 작은 실수를 하면 혼이 나고, 성격이 더러워진 나는 그냥 받아친다. ‘될 대로 되라, 난 내 일만 끝내고 간다.’ 요즘 내 마음은 늘 이랬다.


문제는 이게 반복된다는 거였다. 처음엔 모든 일이 즐거운데, 6개월쯤 지나면 금세 지루해진다. 예전엔 '내 길이 아니었나 보다' 하고 넘겼지만, 이제는 이게 습관이 된 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번엔 도망치지 말고, 뭔가를 끝까지 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하루는 똑같았다. 일은 가끔 재밌지만 대부분 짜증 나고, 모든 게 나와 안 맞는 것 같았다. 그만두기도 애매하고, 버티기도 애매한 그 시점. 결국 생각했다.


‘그럼, 내가 먼저 변화를 만들어보자.’

그렇게 다시 기록을 시작했다. 예전엔 4년 넘게 일기를 매일 썼는데, 어느 순간 멈췄다.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이 되니, 일기조차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엔 가볍게 시작했다. '출근. 피곤. 퇴근. 밥. 잠' 딱 다섯 단어.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금씩 달라졌다. 어느 날은 길가 고양이가 나를 쳐다보던 눈빛이 생각나서 적었고, 또 어떤 날은 퇴근길 하늘이 유난히 예뻐 그 색깔을 한 줄로 남겼다. 그렇게 쌓이다 보니, 매일 같던 하루가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아, 같은 하루라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구나.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도, 왜 늘 지루했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 일기 속 나와는 다른 내가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새로 배운 취향과 감정들이 글 속에 스며들었다. 그걸 보는 게 꽤 재미있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매일 같은 풍경을 다른 빛으로 본 사람. 끌로드 모네.


게티센터 W관에는 그의 작품이 세 점 걸려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한 번쯤 본 그 그림. <건초더미>다.


1.건초더미
wheatstacks


솔직히 처음 보면 “저게 뭐야? 머핀이야? 컵케이크야?” 싶다. 하지만 그건 시골의 볏짚 더미, 정확히는 ‘밀집단’이다. 모네는 그 더미를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그렸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비 오는 날에도, 해 질 무렵에도. 빛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니까. 그렇게 30점을 그렸다. 게티센터, 시카고, 메트, 루브르… 전 세계 미술관에 ‘똑같은 그림이 다르게’ 걸려 있다.


wheatstacks series


그 시대 사람들은 말했다.

“이게 뭐야, 다 같은 그림이잖아?”

하지만 지금 우리는 안다. 그건 같은 그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의 빛을 기록한 거였다는 걸.


당시 모네는 조롱도 많이 받았다.

“스케치밖에 못 하는 사람.” “색감이 이상한 사람.” “미완성 그림이나 내는 사람.”


2. 선라이즈
Sunrise

그가 <선라이즈>를 내놓았을 때, 사람들은 비웃었다.

"해가 뜨는 거야, 지는 거야? 이건 그림이 아니라 얼룩이잖아"


신문에는 이렇게 썼다.

"혁명적이지만 끔찍한 시작(Revolutionary but a terrifying beginning)."


“Revolution in Painting! And a terrorizing beginning,”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느껴지는 대로’ 그리고 싶었다. 그래서 모두가 ‘한물갔다’고 할 때에도, 모네는 계속 자신만의 빛을 쫓았다.


사람들이 모네에게 물었다.


“이번 작품은요?” “<선라이즈>입니다.”

“다음 전시는요?” “역시 <선라이즈>입니다.”


결국 누군가 제안했다. “이렇게 똑같은 그림만 내면 어떡합니까?” “그럼 제목이라도 바꿔보죠.”


그렇게 붙은 단어 하나 — <Impression, Sunrise> (인상, 해돋이).

그 한 단어가 예술사를 바꿨다. 세상을 빛으로 기록한 사람, 끌로드 모네. 인상주의의 시작이었다.



그 옆엔 또 하나의 흐릿한 그림이 있다. <루앙 대성당>. 가까이서 보면 뭉개져 보인다. 하지만 실제 성당은 웅장하고, 디테일한 조각으로 가득하다. 그걸 흐릿하게 그리다니,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3. 르왕 대성당
Rouen Cathedral


모네는 성당 옆 방에서 두 달 반을 머물렀다.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빛이 변할 때마다 붓을 들었다. 결국 그는 30점의 성당을 남겼다. 주인공은 성당이 아니라, 빛이었다.


그 그림을 게티센터에서 멀찍이서 바라보니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우와, 흐리멍텅한 그림이 아니잖아?”


가까이선 안 보이던 윤곽이 또렷해지고, 캔버스 위에 아침 햇살이 번진다. 작품명은 <In Morning Light>, 아침의 빛 속에서. 성당이 아니라, ‘빛’이 주인공이었다.

Rouen Cathedral series


그때 알았다. 삶도 그러지 않을까. 너무 가까이 들여다보면 흐릿하지만, 조금 물러서면 전체가 보인다는 걸. 모네는 그림 속에 빛을 담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빛의 화가'라 부른다. 그의 그림을 보고 나니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내 하루에도, 이런 빛이 있지 않을까.


어쩌면 있었다.

출근길에 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낯익은 노래 한 곡, 점심시간에 잠깐 마신 마차라떼의 차가운 단맛, 회의 중에 실수했지만 아무도 몰라서 괜히 혼자 웃었던 순간.


그건 기록할 가치가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모네가 빛을 그리듯, 나는 그런 사소한 순간들을 남기고 싶어졌다. 똑같은 하루 속에서도, 시간마다 다른 감정을 느낀 순간들을.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지루한 건 하루가 아니라, 내가 같은 각도에서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걸.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어제와 다른 빛이 오늘도 책상 위로 스며들지도 모른다.


모네가 빛을 기록했듯, 나의 사소한 순간들을 기록하며, 매일의 빛을 찾아간다. 오늘은 조금 덜 피곤했다고, 하늘에서 무지개를 봤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고.


**일주일보다도 늦은 업로드! 라스베이거스 여행과 게티빌라 트레이닝 등으로 정신없이 보내다보니 늦게 업로드되었네요..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걸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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