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 <Spring>
어느 날 밤이었다. 책장 구석에서 책 한 권이 손에 걸렸다. 표지는 살짝 헤져 있었고 모서리는 누렇게 말라 있었다. 어릴 때 몇 번 읽다가 덮어버린 채, 그대로 잊고 지냈던 책. 〈어린 왕자〉였다.
기억난다. 어린 시절 이 책을 읽을 때면 “왜?”라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도대체 어떤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그냥 여행담일 뿐인데 왜 사람들이 이렇게 좋아하는지.
별 기대 없이 가볍게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은 단숨에 끝 페이지로 향했다. 예전엔 지루하기만 했던 문장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던 말들이 이상하게도 내 얘기처럼 읽혔다. 겉으론 순수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어른들의 허영과 고립, 권위, 숫자에 매달리는 세계가 조용히 숨어 있었다.
그때 알았다. 아, 이 작품이 시대를 흔든 이유가 있었구나. 어린 시절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너무 선명해질 때가 있다.
게티센터에서도 나는 그 변화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한 화가의 작품을 시기별로 따라가다 보면, 그림의 온도와 시선이 변하는 게 보인다. 어떤 화가는 그 변화가 특히 극적이다. 젊었을 때는 날카롭다가, 말년에는 놀라울 만큼 고요해지기도 한다.
전시장 한가운데 걸린 〈Spring〉 앞에 섰을 때도 그랬다. 작품은 아름답고 조용했다. 꽃과 빛, 바람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작가 이름을 보는 순간, 잠깐 멈추게 됐다.
그 그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Édouard Manet(에두아르 마네).
그 문제작들을 만들어냈던 마네?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그 화가가? 정말 같은 사람이 그린 그림일까.
봄을 그린 혁명가 — 마네의 〈Spring〉
작품의 이름은 〈Spring〉. 1881년. 죽음을 2년 앞둔 화가의 손에서, 봄이 이렇게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
햇살에 부드럽게 반짝이는 드레스, 하늘하늘한 양산, 바람결 같은 꽃장식. 모델이자 연극배우였던 잔느 드마르시를 통해 마네는 당대 가장 세련된 파리지앵, 이른바 Modern Beauty를 한 장면에 담아냈다. 여인이 살짝 몸을 틀고 앉은 자세는 모나리자를 떠올리게 한다. 전통의 구도를 빌려오되, 그 얼굴은 철저히 '현대'를 담았다.
마네의 진짜 흔적은 붓질에 남아 있다. 가까이에서 보면 거칠다. 마치 ‘툭툭툭’ 찍어낸 듯한 터치, 디테일이 지워진 듯한 평면감. 그런데 조금만 멀어지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허술했던 점들이 갑자기 빛과 공기, 형태와 분위기로 살아난다.
마네의 여름 —날것을 정면으로 들이받다
사실 내가 알던 마네는 이런 봄의 화가가 아니었다. 젊은 마네의 그림은 훨씬 더 시끄럽고, 뜨겁고, 공격적이다. 그는 아름다움을 그리기보다, 불편함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화가였다.
그중 하나가 30대에 그린 〈풀밭 위의 점심식사〉다.
옷을 입은 남성들 옆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는 벗은 여인. 당시 사람들에게 이 장면은 단순한 파격이 아니라 규범 파괴였다. 그 시대 미술은 여성을 벗기려면 늘 신화나 종교 같은 핑계가 필요했다. 그런데 마네는 그 핑계를 지웠다. 그리고 누드가 아니라 현실을 드러냈다.
그리고 불과 몇 달 뒤, 더 큰 충격이 온다. 〈올랭피아〉.
올랭피아는 누운 채로 관람자를 바라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응시한다. 마치 "오늘도 오셨네요?"라고 묻는 듯한 태도로. 그 눈빛은 무례할 정도로 당당하다. 관객은 더 이상 편하게 구경할 수 없다. 그림을 보는 대신, 그림에게 보이는 입장이 된다.
사람들은 화를 냈다.
"천박하다." "야하다." "추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이 진짜로 불편했던 건, 올랭피아가 벗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가 부끄러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종과 수줍음을 강요받던 시대에, 올랭피아는 끝까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그 순간 마네는 예술의 범위를 넓혔다. 고귀하고 이상적인 것만 그리던 회화에, 그는 현실의 불편함을 밀어 넣었다. 세상은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는 것을—그는 붓으로 선언했다.
사회생활을 하며 나 역시 그 불편함을 자주 마주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틈. 어릴 땐 몰랐지만, 커서는 피할 수 없었다. 나는 종종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고, 불편함을 그냥 넘기지도 못했다. 서툴렀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밖에 할 줄 몰랐다.
그래서 마네를 이해하게 됐다. 불편함을 외면하지 못한 사람. 보이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할 수 없었던 사람.
그런 마네가 말년에 ‘사계절’을 그리려 했다는 게 뜻밖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의 눈에도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을까. 그러나 연작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다. 남은 건 봄과 가을뿐. 뜨거운 여름과 차가운 겨울은 캔버스 밖에 머물렀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마네의 여름은 이미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세상에 던졌던 치열한 그림들—그것이 여름이었다. 그리고 그 여름을 향한 냉담한 반응들, 그 긴 계절이 그의 겨울이었을지도 모른다.
마네의 끝자락을 함께한 〈Spring〉은 2015년 경매에서 게티미술관이 예상가보다 훨씬 높은 금액에 구매했다고 알려져 있다. 게티는 이 작품을 ‘마네의 혁신’과 미술관의 비전으로 연결해 설명한다.
그런데 그 비전은 의외로 생활 속에 있었다. 게티 곳곳에 놓인 우산들. 그 색은 잔느가 들고 있는 파라솔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관람객들은 무심코 그 우산을 들고 이동한다. 그 순간 게티는 우리 모두를 잔느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그 사실이 조금 감동적이었다. 미술관이 작품을 단지 ‘소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관람객에게 ‘입히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은 가끔 타인의 시간을 내 삶에 잠깐 덧대어준다. 그날 나는 우산을 들고 잠시 잔느가 됐다. 마네가 바라보던 시대의 봄을, 잠깐 빌려 걸었다.
**오랜만에 브런치로 돌아왔어요. 정신없는 1월이지만, 올해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계속 되묻게 됩니다. 여러분의 2026년에도 작은 봄 같은 순간들이 가득하길 바라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