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홍콩, 10명의 이방인

쏟아지는 비와 쌉싸름한 블루문, 지독하게 낭만적이었던 여행의 뒤늦은 기록

by 신세연

출출함을 달래려 무심코 냉장고 문을 열던 참이었다. 평소라면 스치듯 지나쳤을 낡은 마그넷 하나가 유독 시선을 붙잡았다. 10년 전, 홍콩의 비 내리는 야시장에서 처음 만난 일행 중 누군가가 호탕하게 돌렸던 작은 조각.


가만히 마그넷을 쓸어보자니, 그날 밤 함께 낡은 테라스 술집까지 걸어갔던 열 명의 이방인들이 떠올랐다. 그러자 얼마 전 뉴스 화면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익은 얼굴 하나가 그 위로 자연스레 겹쳐졌다. 10년 전 자신을 기자라고 소개했던 그는, 어느새 10년이라는 세월을 단단하게 다진 얼굴로 스튜디오에 앉아 앵커와 담담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그넷을 건네던 호탕한 손길과 뉴스 속의 차분한 얼굴. 그 두 조각의 기억이 방아쇠가 된 순간, 나는 홀린 듯 빛바랜 옛날 여권을 꺼내 들고 오래된 사진첩을 스크롤했다. 출입국 도장이 찍힌 날짜는 2016년 1월. 나는 순식간에 물기를 한껏 머금은 홍콩 침사추이로 빨려 들어갔다.


2016년 1월의 나는 꽤나 큰 인생의 변곡점 위에 서 있었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회사 생활을 정리하고, 막연하게 품어왔던 '소설가'라는 꿈을 향해 진짜 나만의 세계를 지어보겠다고 다짐했던 때였다. 두려움과 설렘이 어지럽게 교차하던 그 시기, 나는 나를 위한 성대한 축하 파티로 홍콩 여행을 계획했다.


있는 돈 없는 돈을 탈탈 털어 평소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왕복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을 끊고, 침사추이의 인터컨티넨탈 호텔을 예약했다. 돌아오는 하늘길마저 완벽하게 세팅해 둔, 나 홀로 떠나는 화려한 출발선. 웃긴 사실은 나는 저 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불확실한 세계로 뛰어드는 나에게 허락한,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사치였던 셈이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낮에 홍콩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미 굵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체크인을 마치고 방에 들어왔지만, 계획 없이 온 여행이었던지라 당장 할 게, 하고 싶은 것도 딱히 없었다. 더 기가 막힌 건, 그 비가 홍콩에 머무는 내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쏟아졌다는 사실이다. 나의 완벽했던 럭셔리 휴가는 시작부터 끝까지 지독하게 물에 젖어버렸다.


나는 결국 옷장 속 한구석에 비치되어 있던 크고 튼튼한 까만 호텔 우산을 무작정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쏟아지는 비를 피해 정처 없이 걷다 들어간 곳은 인근 쇼핑몰의 한 카페였다. 스마트폰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던 때가 아니었던 시절, 여행자들의 유일한 나침반은 포털 사이트의 커뮤니티였다. 커피를 한 잔 시켜놓고 당대 최고의 여행 카페였던 '아이러브홍콩'에 접속해 푸념 섞인 글을 남겼다. '비가 와서 할 게 없네요.' 그저 허공에 던진 혼잣말 같았던 그 글에, 홍콩 곳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이방인들이 실시간으로 응답하기 시작했다.


"우리, 그럼 만날까요?"


그렇게 내가 앉아 있던 쇼핑몰 카페로 낯선 사람들이 물기가 흥건한 우산을 손에 든 채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작은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다. 우리는 어색한 통성명을 나누고 함께 점심을 먹었다. 식후경으로 달콤한 망고 주스를 사 먹으러 갔을 때 일행은 한 명 더 늘어 넷이 되었고, 우리는 내리는 비를 뚫고 야시장으로 넘어가 구경을 시작했다.


그런데 우리가 야시장의 가판대 사이를 누비는 동안에도 카페 게시글의 댓글 창은 터질 듯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홍콩의 빗소리에 갇힌 수많은 혼자된 여행자들이 우리의 번개 모임에 열광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이라도 합류할 수 있나요?"

"침사추이 쪽이면 당장 나갈게요!"


결국 야시장 구경을 서둘러 마치고 야시장에서 누군가 호탕하게 돌린 마그넷을 하나씩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시 침사추이로 넘어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빗속을 뚫고 달려온 새로운 얼굴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렇게 모이고 또 모이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열 명이라는 거대한 무리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갈 곳 잃은 유령처럼 비 내리는 침사추이 거리를 쏘다녔다. 그러다 기적처럼 불이 켜진 텅 빈 테라스 술집을 발견했다. 안주는 없고 오직 병맥주만 가능하다는 주인의 무뚝뚝한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형제 한 팀을 제외하고는 나이도, 직업도, 살아온 궤적도 완벽히 다른 남녀들이 오직 '혼자 홍콩에 온 여행자'라는 이유 하나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내가 주문했던 '블루문' 맥주의 쌉싸름한 맛과 나무 테이블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왕복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와서, 허름한 테라스에서 비를 피하며 마시는 병맥주라니. 철저했던 계획과는 완벽하게 어긋난 밤이었지만, 낯선 도시는 우리를 무장해제 시켰고 익명성이 보장된 이들과의 대화는 기묘한 해방감을 주었다.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막연한 불안감도 그 습한 밤공기 속으로 연기처럼 흩어지는 듯했다. 우리는 가게 주인이 이제 그만 문을 닫아야 한다고 할 때까지 밤이 새도록 떠들었다. 마지막 순간, 우리는 흔들리는 화질의 단체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쿨하게 돌아섰다. 누구도 서로의 연락처를 묻지 않았다.


술집을 나섰을 때, 여행 내내 지독하게도 쏟아지던 비가 거짓말처럼 멎어 있었다. 마치 딱 그 새벽에만 잠시 숨을 고르기로 작정한 것처럼. 까만 호텔 우산을 처음으로 접고 걷던 그 새벽의 공기가 코끝에 스친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 위로 붉고 푸른 홍콩의 네온사인이 일렁였고, 그 거리를 홀로 걷는 내 모습은 한 편의 영화처럼 내 기억 속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소설가라는 불확실한 꿈을 향해 걷는 길이 어쩌면 이 비 온 뒤의 홍콩 거리처럼 내내 축축하겠지만, 결국엔 이토록 지독하게 낭만적인 순간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위로를 받으면서.


종종 누군가 나에게 '낭만'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면 나는 주저 없이 2016년 1월, 비 내리는 홍콩의 새벽을 떠올린다. 야시장에서 마그넷을 쥐여 주던 호탕한 사람도, 블루문을 마시며 떠들던 이들도 모두 내 기억 속에서 완벽한 낭만의 조각으로 남았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지금, 뉴스 화면 속에서 성실하게 기자의 삶을 살아가는 그를 보며 묘한 안도감과 뭉클함을 느낀다. 나 역시 그날 밤의 다짐처럼 매일 활자를 엮어 새로운 세계를 짓는 작가가 되어, 내가 쓴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 무사히 닿고 있으니까. 우리가 함께했던 그 낭만적이었던 새벽이 결코 빗속의 환상이 아니었음을,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도 그런 영화 같은 하룻밤이 기적처럼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받은 기분이다.


오늘 밤엔 시원한 맥주 한 병을 마셔야겠다. 비록 블루문은 아니더라도.


2016년 1월의 홍콩. 완벽한 계획이 어긋난 자리엔 늘 뜻밖의 낭만이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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