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랑 연극 볼래요!" 당돌했던 고3 때 이야기

투명 비닐로 싼 소설책과 종이 열쇠고리, 오래된 머뭇거림에 대하여

by 신세연

내 책장 한구석에는 아직도 투명 비닐로 정성스레 싸인 소설책 한 권이 꽂혀 있다. 2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시절 내가 직접 재단해 씌워둔 비닐 덕분에 책은 놀랍도록 말끔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 매끄러운 비닐의 감촉을 쓸어내릴 때면, 나는 어김없이 십 대 시절의 고요한 여고 도서관으로 빨려 들어간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망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가 가족의 유일한 화두였던 시절.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 사치였다. 대신 나는 책을 읽었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꽤 훌륭했지만, 입시에 치인 여고생 중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나 혼자뿐이었다. 적막한 도서관은 팍팍한 현실을 도피하기에 완벽한 은신처였다.


도서관의 책들을 미친 듯이 읽어 치우면서도, 어떤 이야기들은 기어코 '온전한 내 것'이기를 바랐다. 가난한 주제에 책 살 돈이 어디 있었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서정가제가 지금처럼 엄격하지 않던 그 시절, 인터넷 서점에서는 갓 출간된 신간도 꽤 큰 폭으로 할인해 주곤 했다. 나는 오롯이 내 것인 책을 갖기 위해 차비를 아끼려 몇 킬로미터를 걷고, 때로는 기꺼이 한 끼를 굶었다.


그렇게 굶주림과 맞바꿔 내 손에 들어온 책은 세상 무엇보다 귀했다. 행여나 1쇄의 깨끗한 표지가 상할까 봐, 투명 비닐을 크기에 맞춰 정성껏 재단해 책을 감싸고 또 감쌌다.


그렇게 투명 비닐을 빳빳하게 입힌 책들을 끌어안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나는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은 물론이고, 수업 시간에도 교과서 밑에 몰래 소설책을 숨겨두고 활자를 삼켰다. 거의 하루에 한 권 꼴로 책을 읽어 치우던 시절이었다.


고3이 입시 공부는 안 하고 수업 시간에도 책만 파고 있으니 당연히 여기저기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과목 선생님들에게 번번이 혼이 났고, 그 괘씸한(?) 소문은 고스란히 담임 선생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결국, 어느 날 책에 코를 박고 있는 나를 향해 담임 선생님이 다가왔다.


"세연아, 도대체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읽니?"


그때 내 손에 들려 있던 건 일본 소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였다. 마침 담임 선생님의 담당 과목은 일본어였다. 어쩌면 그래서, 매일같이 혼나면서도 일본 소설에 푹 빠져 있는 내게 핀잔 대신 시선이 머무셨는지도 모르겠다.


제목을 확인한 선생님은 책을 다 읽으면 자신에게도 빌려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뒤, 나는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적은 포스트잇을 빳빳한 비닐 커버 안쪽에 조심스레 붙여 선생님께 건넸다.


며칠 후 책을 돌려주시며, 선생님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연극 티켓 두 장을 불쑥 내미셨다. 친구랑 주말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 티켓을 받아 든 순간, 내 입에서는 전혀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선생님, 저 선생님이랑 같이 보고 싶어요!"


돌이켜보면 참 당돌한 고3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빙긋 웃으며 그러자고 하셨다.


우리는 주말의 대학로에서 만났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 선생님은 나에게 따뜻한 저녁을 사주셨다. 마주 앉아 밥을 먹던 중, 나는 가방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조심스레 밀어놓았다.


"선생님이랑 연극 보러 간다고 했더니, 엄마가 선생님 드리라고 만들어 주셨어요."


상자 안에는 종이공예로 만든 예쁜 열쇠고리가 들어 있었다. 당시만 해도 학부모들이 선생님께 촌지를 건네는 관행이 알게 모르게 자연스럽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독히 가난했던 우리 집은 선생님께 건넬 빳빳한 봉투 하나를 챙길 형편이 되지 못했다.


대신 엄마는 선생님과 데이트를 간다는 딸의 말에, 고마움과 미안함을 꾹꾹 눌러 담아 손수 열쇠고리를 접어 예쁘게 포장해 주셨다. 돈 봉투 대신 건네진 그 조촐하고 초라한 선물을 받아 든 선생님은 눈을 반짝였다. 정말 예쁘다고, 어머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그 다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왜 울었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른다. 번듯한 봉투 하나 쥐여주지 못해 밤새 종이를 접었을 엄마의 애달픈 사랑과, 돈의 무게가 아닌 마음의 무게로 그 선물을 받아주는 선생님의 온기가 한꺼번에 밀려와서였을까.


식당 한가운데서 주책없이 눈물을 훔치는 열아홉 살을 선생님은 가만히 다독여주셨다. 그날 무슨 연극을 봤는지, 내용은 어땠는지 내 머릿속엔 단 한 장면도 남아있지 않다. 오직 마주 앉아 먹던 따뜻한 저녁밥과, 선생님의 손에 들려 있던 종이 열쇠고리만이 짙은 잔상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5년 2월 졸업식 날. 다들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는데, 유일하게 훌쩍거린 애는 나 하나였다. 대성통곡을 한 건 아니고, 그저 알 수 없는 감정에 울컥해 소리 없이 눈물 한 방울만 또로록 떨어뜨리고는 행여 누가 볼까 몰래 쓱 닦아냈다.


졸업 후에도 내 마음속에는 늘 선생님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승의 날이 다가올 때면 문득문득 그날의 대학로가 떠올랐다. 하지만 찾아갈 수 없었다. 여전히 가난했고, 딱히 번듯한 어른으로 자라나지도 못한 것 같았다. 수천 명의 학생을 스쳐 보냈을 선생님에게, 나는 그저 '지나가는 학생 1'일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이 내 발목을 잡았다.


시간은 그렇게 무심히 흘러갔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매일 활자를 엮고 이야기를 짓는 작가가 되었다. 제법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작가로서의 어느 정도 사회에 뿌리내렸다고 느끼자 비로소 선생님을 찾아뵈어야겠다는 용기가 났다.


떨리는 마음으로 모교에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선생님이 이미 퇴직하셨다는 것이었다. 개인정보라 연락처도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허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인스타그램에 모교를 태그 해 그 시절의 짧은 회상과 아쉬움을 남겼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후배라는 한 분이 디엠을 보내왔다. 자신은 졸업 후에도 아직 연락하고 지내는 다른 선생님이 계시니, 그분을 통해 내 담임 선생님의 연락처를 여쭤봐 주겠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감사했다. 그렇게 수소문 끝에, 나는 드디어 선생님의 전화번호를 전달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번호를 저장했다.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귀여운 어린아이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마도 선생님의 손자, 손녀들인 것 같았다. 그 평화로운 사진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나는 끝내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번호를 저장해 두고도 벌써 몇 년째 안부 문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있다.


"선생님, 저 2004년도 3학년 4반 신세연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흐르면 어떡하지. 결국 나는 수천 명의 제자 중 하나였을 뿐인데, 나 혼자 너무 유난을 떠는 건 아닐까. 매일 새로운 세계를 짓는 작가가 되었으면서도, 현실의 내 서사 앞에서는 여전히 지레짐작만 앞서는 찌질한 열아홉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못난 마음 뒤에 숨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가오는 올해 5월, 스승의 날에는 기어코 용기를 내어 통화 버튼을 눌러보려고 한다. 그날의 대학로 저녁밥을, 내가 건넨 책 안쪽의 포스트잇을, 엉성했던 종이 열쇠고리를 선생님이 전부 잊으셨어도 괜찮다. 기억하지 못하신다면, 다시 처음부터 나를 소개하면 될 일이다.


그저 내 인생에서 가장 춥고 막막했던 시절, 3학년 4반 교실에서 기꺼이 당신의 곁을 내어주었던 그 다정함 덕분에 그때의 가난했던 여고생이 이제는 매일 활자를 엮는 제법 번듯한 어른이 되었다고. 그 말 한마디만은 꼭 전하고 싶으니까.


전화를 걸기 전, 이십 년도 훌쩍 넘은 투명 비닐 커버를 한 번 더 조심스레 닦아두어야겠다.



IMG_3369 2.jpg
IMG_3370 2.jpg
책 한 권이 너무도 소중했던 시절, 행여 표지가 상할까 투명 비닐을 직접 재단해 씌워두고 읽곤 했다. 그 시절의 애틋한 마음을 책은 아직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비 내리는 홍콩, 10명의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