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백수의 손에 들려 있던 명절 선물세트의 무게
나이를 먹으면 추억을 파먹고 산다고 했던가. 당장 오늘 점심에 뭘 먹었냐는 질문에도 대답을 주저할 만큼 기억력이 희미해지는데, 유독 어떤 과거들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재생되곤 한다.
나에게는 아주 오랜 친구가 하나 있다. 나보다 한 살이 어리고, 학번으로는 2학번이나 아래인 대학 후배.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훌쩍 넘겨서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잘 지내고 있다. 그런데 요즘 그 친구에게 꽤 힘든 일이 생겼다.
수화기 너머로 한참을 힘들어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그런 말을 건넸다.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니까, 이 힘든 일도 결국 다 잘 해결될 거라고. 발 없는 위로 같았지만 진심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아주 오래전 그 친구와 나 사이에 있었던 작고 사소한 하루가 불현듯 떠올랐다.
20대의 나는 지독하게 가난했다. 어려서부터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하루에 알바 3개를 연달아 뛰며 숨 막히게 돈을 벌었던 날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바닥을 기며 악착같이 살아내다 보면, 어느 순간 벼락처럼 '현타'가 찾아오곤 한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싶어지는 순간. 나는 결국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일을 다 때려치웠다. 아무런 대책도, 생각도 없이 하루하루를 흘려보내던 나의 헛헛한 백수 시절이었다.
내 친구 역시 나 못지않게 치열하고 열심히 세상을 살아내던 애였다. 하지만 멈춰버린 나와 달리 친구는 여전히 바쁘게 톱니바퀴를 굴리고 있었다. 어느 평일,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던 나는 불쑥 친구의 회사 앞으로 찾아갔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다. 우리는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평소처럼 실없는 수다를 떨었다.
짧은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 자리라고 해봐야 나는 덩그러니 남겨진 백수의 방뿐이었지만. 집으로 가려는 나를 붙잡고 친구가 말했다.
"언니, 잠깐만 기다려 봐."
잠시 후 회사로 뛰어 들어갔다 나온 친구의 손에는 웬 종이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추석 선물세트였다. 햄이나 참치 캔 몇 개가 들어있을 법한, 대단히 거창하거나 비싼 것도 아닌 흔한 명절 세트. 친구는 그걸 내 손에 덜컥 쥐여주며 말했다.
"언니, 이런 거라도 하나 들고 들어가야 부모님이 좋아하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무언가 툭 하고 끊어지는 것 같았다. 백수 딸내미가 빈손으로 터덜터덜 집에 들어갔을 때, 행여나 부모님 마음이 쓰일까 봐. 혹은 내 마음이 더 작아질까 봐. 친구는 회사에서 받은 자기 몫의 명절 선물을 기꺼이 내게 내어준 것이다.
그 선물세트 하나를 품에 안고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이상할 정도로 참 좋았다. 묵직한 종이가방의 무게만큼, 텅 비어있던 내 속이 든든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소속도, 타이틀도 없던 잉여로운 백수였지만 그 버스 안에서만큼은 내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정말 오래된 일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의 기억 하나로 내 친구의 모든 삶을 맹목적으로 응원한다. 그 명절 선물세트에 담겨 있던 다정함이 얼마나 깊고 단단한 것이었는지 나는 아니까.
지금 모진 비바람을 맞고 있는 내 친구가, 결국엔 이 시간을 무사히 건너갈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녀는 텅 빈 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뻔뻔한 백수 언니의 좁은 어깨를, 누구보다 따뜻하게 감싸줄 줄 아는 좋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