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_ 우리는 왜 조를 부끄러워했을까

찰스 디킨스, 우리가 부끄러워했던 가장 빛나는 시절에 대하여

by 신세연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참 다정한 동화 같은 제목을 달고 있습니다. 가난한 소년이 우연히 큰돈을 상속받아 신사가 되는 이야기. 얼핏 보면 그런 낭만적인 성장담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 다시 읽어보면 이 소설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가난한 소년이 부자가 되는 통쾌한 성공담이라기보다,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속물근성’을 집요하게 끌어내는 이야기입니다. 내 안의 부끄러운 민낯을 들키게 만드는, 조금 잔인할 만큼 솔직한 소설이기도 합니다.


디킨스가 위대한 이유는 인간을 쉽게 비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가 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을 너무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됩니다.


문제는 핍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주인공 핍은 시골 마을에서 자란 가난한 고아입니다. 그런 그를 거두어 친아들처럼 키워준 사람은 누나의 남편, 대장장이 ‘조’였습니다. 조는 많이 배우지 못했고 말투도 투박했습니다. 하지만 세상 그 누구보다 핍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핍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후원자가 나타납니다. 막대한 유산을 남기겠다는 약속이었죠.


하루아침에 인생이 바뀝니다. 핍은 런던으로 보내지고 신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상류층의 세계가 그의 눈앞에 펼쳐집니다.


비극은 돈이 없을 때가 아니라, 돈이 생기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런던의 반짝이는 세계 속에서 핍은 조금씩 변해 갑니다. 자신을 그토록 아껴주던 조가 런던으로 찾아왔을 때, 핍은 반가워하기는커녕 안절부절못합니다. 조는 낡은 모자를 든 채 화려한 거실에서 어쩔 줄 몰라했고, 핍은 그런 조의 투박한 손과 어색한 말투가 수치스럽게 느껴집니다.


혹시라도 자신의 세련된 상류층 친구들이 이 볼품없는 대장장이를 볼까 봐 전전긍긍하죠.


결국 조는 핍의 싸늘한 눈빛을 읽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려 책장을 덮고 싶어 집니다. 핍이 너무 못돼서가 아닙니다. 화려한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나의 작고 초라한 뿌리를 애써 부정하려 했던 부끄러운 순간이, 제 안에도 분명히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런던’이 있습니다.


조금 더 세련되어 보이는 무리, 그럴듯한 명함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 SNS에서 번쩍거리는 화려한 라이프스타일. 우리는 그 빛나는 세계에 속하고 싶어 끝없이 발버둥을 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세계에 조금 가까워졌다고 느끼는 찰나가 오면 이상한 착각에 빠집니다.


내가 원래부터 이런 세상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는 착각.

그 착각은 아주 쉽고 빠르게 우리를 속물로 만듭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에게도 핍처럼 런던의 환상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고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저녁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모임을 가지고,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의 명함을 수집하며 그것이 마치 제 가치인 양 우쭐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인연들이 생겼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동네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캔맥주를 부딪치며 밤새 고민을 나누던 오래된 친구들. 저는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점차 그들의 연락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진짜 이유는 바빠서가 아니었습니다.


값비싼 와인과 트렌디한 대화가 오가는 제 새로운 세계에, 삼겹살에 소주를 먹으며 철없는 농담이나 던지는 그 친구들의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은연중에 선을 그어버린 겁니다.


그 친구들이 제게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단지 제가 새로 입은 비싼 옷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극히 얄팍한 이유뿐이었죠.


핍이 대장장이 조를 부끄러워했던 것처럼, 저 역시 나의 가장 솔직하고 찌질했던 시절을 아는 그 친구들의 투박함을 속으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짜 반짝임은 진짜 위기가 찾아오면 가장 먼저 빛을 잃습니다.


소설 속에서 핍은 결국 그 막대한 유산이 모두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빚더미에 앉아 열병을 앓으며 완전히 몰락합니다. 그가 그토록 애써 매달렸던 런던의 상류층 친구들은 병든 그를 철저하게 외면합니다.


그때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은 핍을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조였습니다.


그는 말없이 핍의 빚을 정리해 주고, 마치 어린 시절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곁에 조용히 앉아 있습니다.


핍이 그토록 촌스럽다고 밀어냈던 그 사랑이 벼랑 끝에 선 그를 붙잡아 줍니다.


저의 얄팍한 런던 역시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일이 크게 어그러져 바닥을 치게 되었을 때, 제가 자랑처럼 모아두었던 그 화려한 인맥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습니다. 세련된 대화를 나누며 호의를 베풀던 사람들은 나의 실패가 자신들에게 번질까 봐 아주 정중하고 차갑게 거리를 두었습니다.


철저히 혼자가 되어 불 꺼진 방 안에 웅크려 있던 어느 밤, 제게 무작정 전화를 걸어온 건 제가 촌스럽다고 밀어냈던 바로 그 친구였습니다.


“요즘 힘들다며. 나와, 소주나 한잔하자.”


그 투박하고 덤덤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습니다. 나의 타이틀이나 쓸모가 아니라, 그냥 ‘나’라는 사람 자체를 걱정해 주는 사람. 내가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 했던 그 초라하고 소박한 세계가 사실은 내 삶을 지탱하고 있던 가장 단단한 바닥이었다는 걸, 저는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유산을 좇습니다. 더 높은 연봉, 더 좋은 집, 더 번듯한 인맥. 그런 번쩍거리는 ‘위대한 유산’이 내 삶을 구원해 줄 거라 믿으면서요.


하지만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덧칠한 금박은 비바람이 불면 가장 먼저 벗겨집니다.


어쩌면 우리 삶의 진짜 유산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을 때 나를 믿어주었던 사람들. 아무 조건 없이 건네주었던 투박한 다정함. 가장 초라한 모습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고 기꺼이 곁을 내어준 소박한 인연들.


그래서 저는 이제 화려한 명함을 수집하는 대신, 편의점 앞 플라스틱 의자에서 마시는 캔맥주의 시간을 조금 더 소중히 지켜내기로 했습니다.


내 삶의 ‘조’들을 더 이상 외롭게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

그것이 뒤늦게 철이 든 제가 평생을 걸고 지켜내고 싶은, 저만의 진짜 위대한 유산입니다.


— 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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