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코난 도일,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에 대하여
셜록 홈즈는 아마도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매력적인 판타지일 겁니다.
판타지라고 하면 우리는 보통 회빙환, 그러니까 회귀나 빙의, 환생 같은 설정을 떠올립니다. 죽었던 인생이 다시 시작되고,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며, 평범한 사람이 어느 날 다른 존재로 깨어나는 세계 말입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의 세계에는 그런 장치가 없습니다. 마법도 없고 초능력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더 유혹적입니다.
그의 세계에서는 세상의 모든 일에 완벽한 인과관계가 존재합니다.
길가에 버려진 담배꽁초 하나, 구두 굽에 묻은 진흙 한 점, 무심코 흘린 한마디의 말. 그 무엇도 우연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논리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이성이라는 돋보기를 들이대는 순간 세상의 혼돈은 질서를 드러냅니다. 아무리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라도 그의 명석한 두뇌 앞에서는 순식간에 풀려 하나의 정답으로 정리됩니다.
우리는 그 빈틈없는 해답 앞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낍니다.
세상이 사실은 이해 가능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착각.
그 착각이 주는 평온함 때문일 겁니다.
19세기말, 셜록 홈즈가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거의 충격에 가까운 매혹을 느꼈다고 합니다. 당시 범죄 이야기는 대부분 모험담에 가까웠습니다. 사건은 자극적이었지만 해결은 대개 운이나 우연에 기대곤 했습니다. 그런데 코난 도일은 전혀 다른 인물을 만들어 냈습니다. 감이 아니라 관찰로, 직감이 아니라 논리로 사건을 해결하는 인간. 홈즈는 단순한 탐정 캐릭터가 아니라 인간 이성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이후로 수많은 탐정 캐릭터가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탐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얼굴은 여전히 셜록 홈즈입니다. 그는 캐릭터를 넘어 하나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성의 상징. 논리의 상징. 그리고 인간이 세계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의 상징.
어쩌면 우리가 셜록 홈즈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너무 비현실적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은 그의 세계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현실은 지독하게 불공평하고 종잡을 수 없습니다. 때로는 아무 이유 없이 잔인하기도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자리를 잃고, 평범한 하루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산산이 부서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계획을 세우고 대비하지만 우연이라는 변수 하나가 그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홈즈 같은 존재를 꿈꿉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을 논리로 설명해 내는 사람. 혼돈 속에서도 반드시 정답을 찾아내는 사람. 그의 차가운 이성은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세계를 대신 정리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세상은 유난히 이 ‘홈즈들’을 우대합니다.
감정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이성과 데이터만이 정답처럼 여겨집니다. 사람들은 관계 속에서도 손익을 계산합니다. 논리의 허점을 찾아 상대를 무너뜨리는 ‘팩트 폭행’에 환호하고 “맞는 말이잖아”라는 한마디로 타인의 상처를 가볍게 밀어냅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타인의 행동은 몇 개의 알파벳으로 정리됩니다. MBTI 같은 도구가 사람의 내면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불확실한 관계 속에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우리는 점점 더 단단한 갑옷을 입습니다. 감정 대신 논리를, 이해 대신 분석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손해 보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역시 오랫동안 그 차가운 이성을 신뢰해 왔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은 미숙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갈등이라는 것은 결국 논리로 정리할 수 있는 문제라고 믿었습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문제는 제대로 분석하면 해결된다고 여겼습니다.
한 번은 가장 가까운 사람과 크게 다툰 적이 있었습니다.
상대는 서운함을 토로하며 감정이 격해진 상태였고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법정에 선 검사처럼 말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사건의 타임라인을 정리했습니다. 언제 어떤 말이 오갔는지, 어떤 상황에서 감정이 뒤틀렸는지 하나씩 짚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상대의 말속에 숨어 있는 논리적 모순을 차근차근 지적했습니다. 어디가 틀렸는지, 무엇이 과장되었는지, 어떤 부분이 사실과 다른지. 제 주장은 빈틈이 없었습니다. 결국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완벽한 논리적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저는 상대의 표정을 보게 되었습니다. 논리로 두들겨 맞은 사람의 표정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설득도 납득도 없었습니다. 단지 깊은 단절감과 실망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왜 화가 났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저 내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사람을 차갑게 심문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관계에서는 완전히 패배한 순간이었습니다.
이성은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너무 날카로운 메스가 되기도 합니다. 메스는 상처의 원인을 정확하게 도려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몸을 따뜻하게 안아 줄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셜록 홈즈의 삶도 어딘가 비슷합니다.
그는 런던의 수많은 사건을 해결한 천재였지만 사건이 없는 시간에는 지독한 권태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베이커가 221B번지의 방 안에서 그는 종종 코카인에 손을 댔습니다. 세상의 모든 트릭을 꿰뚫어 보는 두뇌를 가졌지만 정작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일에는 서툴렀기 때문입니다.
홈즈는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는 천재였지만 인간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만큼 서툰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머릿속이 논리와 팩트로만 채워진 인간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춥습니다. 그 고독한 천재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추리력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곁에 왓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왓슨은 홈즈를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기행을 논리로 설명하려 들지도 않았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굳이 해석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옆에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삶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범죄 현장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쳐 정답을 찾아야 하는 사건도 아닙니다. 시시비비를 완벽하게 가린다고 해서 상처가 치유되는 것도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재 탐정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논리적 오류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사람보다 앞뒤가 맞지 않는 감정 앞에서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주는 사람이 더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날 밤 이후 저는 관계 속에서 돋보기를 드는 일을 조금 줄이기로 했습니다.
갈등이 생길 때마다 누가 맞고 틀렸는지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이 올라옵니다. 혀끝까지 올라온 팩트를 말하고 싶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그 말을 삼킵니다.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 반드시 좋은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정교한 퍼즐이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가장 정확한 말이 가장 잔인한 말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통제하려는 이성의 오만함을 조금 내려놓는 것.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감정을 굳이 해부하지 않는 것.
설명되지 않는 마음을 설명되지 않는 채로 곁에 두는 것.
어쩌면 우리가 배워야 할 지혜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가끔은 똑똑한 이성의 스위치를 잠시 꺼 두는 것.
그리고 그 대신 조금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해 보려는 것 말입니다.
— 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