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애월(1)
머문 기간 : 9/29 ~ 10/2
머문 장소 : 애월
인원 : 1명
#1
다들 심연의 깊은 곳에서는 언젠가 혼자 여행을 떠나보겠다는 마음을 품고 살지 않나요? 나는 그래요. 쏟아지는 햇살, 이어폰에서는 내 취향의 노래가 나오고, 어깨에 멘 배낭이 조금 무겁긴 하지만 운동화를 신어서 괜찮아. 바람은 선선하게 불고 노을에 맥주 생각이 나면 덜컥 멈춰서 맥주를 사 마셔요. 그러면서 잊고 있던 생각들을 끄집어내는 거죠. 누군가와 함께일 때는 깊게 빠지지 못하는 혼자만의 고독을 곱씹고, 여행이 아니면 절대 하지 않을 일탈도 한 번 해봅니다.
나의 심연에는 그런 낭만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혼자 걷는 나를 종종 상상하곤 했다. 상상 속의 나는 꽤 즐거워 보이기도 하고, 퍽 안쓰러워 보이기도 한다. 아마 인생의 고민 앞에서 고뇌의 시간이 필요해서 떠난 게 아닐까? 어쩌면 거대한 슬픔에 잠식되지 않기 위해 떠난 것일지도 몰라. 여느 영화 속에서 혼자 떠나는 사람들이 대게 그러듯 말이야. 그때, 그곳을, 홀로 걸어야만 하는 사연 같은 게 있을 것만 같아.
그런 상상을 했다.
그런데 낭만이라는 게 참 그렇다.
낭만. 물결 낭(浪), 흩어질 만(漫).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나 심리. 또는 그런 분위기.
상상 속에서는 꽤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로 가져올 마음까지는 없는 모호한 욕망. 나에게 낭만의 정의는 딱 그 정도다. 그렇게까지 원하지는 않잖아. 그렇지? 너의 에너지를 쏟아 실체화하고 그것이 네 상상과 달랐을 때 찾아올 절망까지 감당할 만큼, 그만큼 그걸 갈망하지는 않잖아.
맞아. 나는 대답한다.
낭만은 꿈이 아니다.
이뤄지지 못한 꿈은 슬프지만, 이뤄지지 않은 낭만은 낭만적이다. 아이러닉하게도 이뤄져 버린 낭만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라는 게, 그저 그걸 품고 살았던 순간만이 낭만적이라는 게 나는 슬펐다.
나에게 혼자 떠나는 여행은 꿈은 아니었고, 낭만이었다.
#2
제주도로 출장을 가게 됐다. 목, 금 이틀간.
제주까지 간 김에 주말도 거기서 보내고 오려는데, 이번에 월요일이 공휴일이잖아요? 그래서 항공권이 꽤 비싸더라고요. 일행을 찾기가 어렵길래 그냥 혼자 머무르다 오려고요. 왜 혼자 여행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한다. 뭐 어느 정도는 사실이긴 한데, 같이 여행하겠느냐고 주변에 묻진 않았다. 실제로 항공권이 꽤 비싸기도 했고, 내심 이참에 나의 오래된 낭만을 현실로 끄집어내 보고 싶기도 해서. 기회가 찾아왔을 때, 덜컥 잘 잡는 편이다.
일요일 저녁에 돌아오는 비행기표를 끊고 출발 전날까지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 전날에 회사 사람들이 제주도 가서 뭐 할 거냐고 물어보는데, '정말 이렇게 아무런 계획이 없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원래 계획 없이 어디 가는 거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돌이켜 보면 늘 같이 가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계획은 해줬는데 혼자 떠나려고 보니 날것 그대로의 나는 살짝 심하게 계획이 없는 편이었다.
전날까지 숙박조차도 예약하지 않은 나를 보며 이러다가는 제주도에서 노숙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근무 시간에 슬쩍슬쩍 딴짓하며 구글 지도 켜놓고 게스트 하우스 1박, 야외 수영장을 운영하는 호텔 1박을 예약했다.
제주에서 뚜벅이로 넓게 여행하는 거 고역이니 이번에도 한 곳에 있기로 하자. 어디에 머무를까? 큰 고민은 없었다. 올해는 지금이 서핑 막바지일 거 같아 저번에 제주를 방문했을 때 서핑했던 곽지 인근과 애월에 머무르기로 했다. 애월은 바다가 예쁘기도 하고, 공항과도 가깝고 나름 볼거리도 많고. 2달 전에 머물렀던 협재와 살짝 코드가 겹치긴 하지만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 같은 장소에 가면서 기어코 다른 경험을 하겠다고 우기는 게 고통이다. 그때와 비슷한 경험을 해도 괜찮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또 다른걸.
가서 종일 핸드폰만 보다가 돌아오는 불상사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걸어두기로 했다. 우선 일기장을 챙기고(결과적으로 너무 좋은 선택이었다. 이 여행기의 대부분은 여행지 구석구석에서 펜으로 꾹꾹 눌러 적은 일기들로 구성될 예정이다.), 책도 한 권 챙긴다.
출발 일주일 전부터 홀로 여행을 하며 읽고 싶은 책을 미리 정해뒀는데, 나의 그놈의 '다음에 병'에 의해 끝내 구매하지 못했다. 그 책을 사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작가의 생계에 도움이 되고 싶어서.
꽤 오랜 시간 그 사람의 글을 읽어왔던 터라 목차를 보니 한 절반 정도는 이미 초안으로 읽은 글들이었지만 꼭 사겠다고 다짐했다. 또 읽으면 또 읽는 대로 좋을 거 같기도 했고, 그녀의 주머니에 책값을 넣어주고 싶었거든. 동정은 아니고. 연민도 아니고. 그냥.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마땅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앰베서더에게 높은 모델료를 지불하는 브랜드로 유명한 디올은 그 이유를 "디올의 앰배서더가 경제적으로 힘들기를 원치 않는다."라고 말했다던데 나도 그렇다. 좋은 글을 쓰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계속해서 좋은 글을 써줬으면 좋겠다. 최대한 많이. 내가 매일매일 읽을 수 있게.
흠, 이거야말로 조금 가학적인 바람인 거 같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대출신청을 하면 사무실까지 책을 배송해주는 회사에 다녀서 책 구매는 꽤 오랜만에 했는데, 책 한 권 사려니 허들이 너무 많았다. 인터넷 서점에 접속하니 아이디/비밀번호 생각 안 나고, 겨우 찾아서 로그인했더니 간편 결제 등록이 하나도 안 되어있고, 배송지는 또 이사 전 배송지. 주소지 바꾸다 에잇 안 해! 담에 해! 하고 포기해버림. 그래서 출발 당일 급한 대로 김포공항 근처 대형서점에서 사려고 30분 정도 일찍 출발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대형 출판사에서 자본 빵빵하게 출간된 책이 아니면 오프라인 서점에 깔리기는 힘들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내가 찾는 책은 없었다.
원하는 책은 없고 맘에 드는 책을 골라볼 시간적 여유는 없다? 고전으로 가야 한다. 꾸준히 오래 팔린 책은 뭐라도 그 이유가 있겠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고른다. 산다. 책을 담고 서둘러서 공항으로 향한다.
빠듯한 시간에도 카페인 한잔을 수혈하고 비행기를 타니 새삼 가슴이 두근거린다. 여정의 출발은 언제든 조금 설레기 마련이다. 업무의 일환이어도 그렇다. 다행히(?) 비행기 좌석이 회사 사람들과 뿔뿔이 흩어져서 나 홀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방금 산 책을 기웃거리다 오래전에 오프라인으로 저장해둔 노래들을 들으며, '아 내가 이걸 좋아했었지. 그런 시간들이 있었지.' 한다.
비행기는 50분 만에 나를 따뜻한 남쪽 섬에 내려준다. 나는 제주공항에 내려 찬란한 햇살을 맞는다. 날씨가 선물 같다.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
나도 모르게 말했다. 내가 언제부터 바다에 들어가는 걸 좋아했지? 제주만 오면 바다에 들어가고 싶어져. 내 몸의 움직임이 보이는 투명한 색감, 마냥 싫지 않은 짠 물의 끈적임. 그리고 바다를 사랑한 첫 기억 같은 거. 제주의 바다에는 그런 특별한 것들이 있다.
또 주변을 둘러봐. 다들 얼굴의 주름이 평화롭게 굽어지잖아. 그 평평하고 나긋한 굴곡이 좋다. 그 속에 있으면 나도 같이 평화로워지는 기분이 좋아. 그런 게 좋아.
같이 간 동료가 "오기 싫었는데 막상 오니까 좋네." 한다.
나는 "오고 싶었는데 막상 오니까 새삼 좋아요." 한다.
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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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싶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