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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핏 Jan 04. 2019

꺼지려고 할 때쯤 더욱 타오르는
-영화 <다마모에>

영화 <다마모에>와 희곡 <비네거 탐>




나이 든 여성에 대하여


 고백하자면 나는 노년에 대하여 말하기 싫어한다. 그 이유는 노년을 언급만 해도 그들을 도와주지 못한 데서 오는 죄책감과 언젠가 노년의 한 사람이 될 사람으로서의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늙은 여성에 대해서 실컷 이야기나 해보려고 한다. 그렇게 라도 해야 할 것 같다.

 영국의 걸출한 여성 극작가 카릴 처칠이 쓴 <비네거 탐>이란 희곡이 있다.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희곡에는 ‘마녀’라는 대상이 등장한다. 사람들은 모두 마녀에 대해 나쁘게 말한다. 정작 마녀가 누군지 마녀가 무언지 정확하게 정의 내리지는 못하지만 세간의 눈밖에 날만한 행동을 하는 늙은 여성들, 고양이를 키우는 다소 자유분방한 과부 여성들이 주로 표적이 된다. 희곡 속 사람들은 덮어놓고 늙은 여성을 싫어한다. 

 이 희곡에는 ‘모두들 늙은 여자에 대하여 말하기 싫어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너무 공감이 갔기에 나는 단번에 그 구절을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벌써 쓰인 지 몇십 년도 더 된 희곡에 등장할 정도니 예전부터 노년의 여성이란 사람들이 논하기 싫어하는 주제였나 보다. 분명하게 말하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다. 


#비/미혼여성의 경우


  자손 생산이 가능한 여성과 폐경기 이후의 이분법으로 여성을 나누는 어떠한 사람들은 더욱 폐경기 이후의 여성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꺼려한다. 그들은 오로지 섹시한 여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누구 가슴이 엉덩이가 어떻다고 품평한다. 그 외의 여성은 세상에 딱 하나 남는다. 바로 ‘엄마’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엄마가 되지 않는 것을 선택하여 살아오다가 폐경을 맞은 여성은 어떠한가? ‘누구의 엄마도 아닌’ 폐경기 이후의 여성을 우리 중 누군가는 함부로 아줌마라 칭할 것이다. 하지만 아줌마의 정의에 미/비혼 여성이 포함되었던가? 우리에게는 ‘중년이 지나버린 미/비혼의 여성’이란 개념조차 막 적응해야 할 낯선 개념이다. 그들을 뭐라 불러야 할지도 몰라 ‘노처녀'’라 통칭하지만 듣는 사람이 기분 나쁜 단어이며 연령 특정성이 부족한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확실히 우리들 인식 속에서 중년 이후의 여성은 누군가의 엄마란 고정관념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나이 든 여성을 일반화한 후 혼인 여부를 묻기도 전에 아줌마 혹은 어머님으로 통칭하고 만다. 이렇게 한 연령집단을 지칭하는 언어가 발달하지 않았다는 것은 해당 집단에 대한 우리의 논의가 부족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중년 이후의 여성을 칭하는 단어는 주로 관계와 관련된 단어(엄마, 할머니)다.


# 엄마의 경우


 일본에는 <다마모에>(2007)라는 소설 원작의 영화가 있다. 꺼져갈 때쯤 더욱더 타오르는 불빛이란 뜻을 지닌 이 ‘다마모에’에는 중년 이후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제 막 정년 퇴임한 남편이 죽자 그녀는 졸지에 ‘미망인’이 된다. 처음엔 적응이 어려운 듯했지만 그녀는 미망인이란 단어를 비웃듯 남편이 사라진 집안 인테리어를 바꾸고 자신에게 오로지 희생과 유산상속만 요구하는 못난 자식들을 집에서 쫓아낸다. 하지만 그녀가 처음부터 이렇게 단호한 마음을 먹은 건 아니다.

 원래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정숙하고 착하던 주인공은 자신의 착함을 이용하려는 타인들과 자식들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자신을 믿어주는 친구들과 더불어 살아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안타깝지만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세상이다. 그녀는 순수한 의도로 착하게 살았다. 사랑받지 못하는 중에도 엄마와 아내로서 의무를 다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터무니없는 요구와 종전보다 더 큰 호의와 인간으로서의 ‘무시’였다. 극 중 그녀는 생전 남편의 말이라며 이런 소릴 전해 듣는다. 생전의 남편이 자신을 두고 '바꾸기는 귀찮은 오래된 가구 같다'라고 표현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충격을 받는다. 나 역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마음에 그 대사가 오래 머물렀다.



# 엄마와 욕망


  보통의 ‘엄마’들은 늘 집에서 의무를 다한다. 사회가, 자식들이, 남편이, 자신에게 요구한 걸 다 해온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부도 사회적으로는 성공할 길이 없고, 자신이 모든 것을 바친 집안에서조차 인정을 못 받고는 한다. 오냐오냐 한 자식들은 유산과 본가가 제 것인 줄 안다. 사회적으로 실패한 자식은 마치 다시 자궁을 찾아오듯 엄마에게 회귀하기도 한다. 왜 엄마는 늘 퍼주고받아줘야 하는 걸까? 노년의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돈이 필요한 건 오히려 엄마 쪽인데 말이다. 이미 친정을 잃은 엄마는 지칠 때 찾아갈 곳이 없다. 남편이 죽고 나면, 엄마 자신이 사는 집이 그녀에게 남겨진 전부다. 

 영화 <다마모에>에는 엄마가 욕망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자식들은 무심하게도 엄마의 욕망을 몰라준다. 영화 속에 묘사되는 엄마의 욕망은 풀어본 적이 없어서 방황하는 청소년의 그것과 비슷하다. 억압은 그렇게 오래도록 엄마를 눌러 오다가 비로소 내면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 주인공의 남편이 결혼생활 내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는 게 드러난다. 결국 그녀에게는 믿음 조차 남지 않고 원망할 대상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 여태껏 욕망을 억누른 대가가 너무 잔혹하다. 


 온전하고 자상한 엄마를 둔 자식들은 자신이 얼마나 자신의 엄마를 당연시 해왔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엄마는 오래된 가구가 아니다. 엄마는 늘 당연하게 똑같이 그곳에 있는 게 아니다. 엄마에게도 눈이 있고 발이 있고 입이 있다. 자식은 엄마도 자신과 똑같이 욕망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어른이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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