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스핏 Oct 20. 2019

아픈 날갯짓, 벌새

아픈 날갯짓벌새

 나는 1994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수대교가 붕괴되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해라는 것과,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일깨운 계기가 된 해라는 사실은 알고 있다. <벌새>는 그런 시절을 증언하는 영화다. 보고 나니 그 시절을 견딘 사람의 생생한 보고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 시절 대치동에 사는 소녀 은희와 만난 것 같은 느낌 말이다.


일상화된 폭력


 영화 <벌새>는 1994년 대치동에 살았던 15살 소녀 은희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여준다. 이런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지만,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큰 장점은 사라져 버리는 순간들을 포착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벌새도 그런 장점을 가진 영화 중 하나다. 

 영화는 사라져 버린 25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며 그때는 그랬지, 하듯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열다섯 은희의 삶 속으로 들어가 1994년의 우리가 얼마나 아팠는지를 알려준다. 


 1994년의 대한민국은 크나큰 외상을 가진 환자와 같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 환자는 워커홀릭이었다. 고통에 무감한 것을 넘어 고통을 장려하기까지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수많은 어린 생명들이 말도 못 하고 아파했다. 그 아픔의 현장에 소녀 은희도 있었다. 

 은희가 다니는 학교에서 제창하는 ‘우리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 식의 무신경한 표어에서 보이듯 학교와 사회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한없이 단순하고 천편일률적인 학생상이다. 은희의 학교에서는 노래방 가고 연애하는 사람을 날라리라고 표현하는데, 그저 살아갈 뿐인 은희는 학교에서 규정하는 날라리 중에 하나가 된다. 어른들은 은희에게 날라리가 되면 안 된다고 말한다. 날라리는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은희의 모습일 뿐인데 말이다.


 극 중 부모님의 기대와 부담을 모두 안고 ‘대원외고’와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 중인 은희의 오빠는 자신에게 대드는 은희를 상습적으로 때린다. 어린 은희는 자신보다 크고 센 오빠 앞에서 무력한 피해자가 된다. 은희의 단짝 친구도 자기 오빠한테 맞으며 산다. 

 그들은 자기보다 크고 힘센 폭력 앞에서 ‘더 맞지 않기 위해’ 잠자코 맞기만 한다. 부모에게 아프다고 말해도 둘이 싸우지 말라는 말만 돌아온다. 일방적으로 맞았지만, 아무도 보듬어주지 않는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오빠에게 맞는 은희를 통해 폭력과 억압의 정서가 얼마만큼 자연스럽게 대물림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보편의 상처를 들추어


 여태까지 수많은 성장 서사가 있었다. 그런 영화들 중에서 벌새가 가지는 특별한 점은 다름 아닌 시대성과 보편성에 있는 것 같다. 

 극 중 은희가 동경하는 한자 선생님 영지(김새벽 분)는 아픈 은희의 병문안을 와서 ‘누군가에게 맞으면 어떻게든 맞서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건넨다. 그러나 그렇게 단단해 보이던 선생님도 커다란 사회적 비극 속에 속수무책으로 희생자가 된다. ‘성수대교 붕괴’는 그만큼 큰 상징성을 지닌 사건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적어도 희생당할 수도 있었다. 


 극 중 은희의 언니 수희는 ‘대치동에 살지만 성적이 안 좋아서’ 강북으로 고등학교를 다닌다. 그래서 수희는 매일 아침 성수대교를 지나는 버스를 타고 통학한다. 수희뿐 아니라 수많은 수희들이 그렇게 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 있었다. 아침 등굣길에 성수대교 붕괴 소식을 듣자마자 부모님한테 전화해서 언니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은희의 서사는 그래서 모두의 아픔을 소환한다.

 그 시절, 다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모두가 그렇게 가슴 졸이고 슬퍼했을 것이다. 다행히 버스를 늦게 탄 덕에 수희는 목숨을 구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기뻐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설사 목숨을 잃지는 않았어도 그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을 내내 괴롭히기 때문이다. 

 구사일생의 누나를 옆에 두고 꺼이꺼이 우는 남동생은, 좀 전까지 은희를 때렸던 그 아이와 동일인물이다. 인간이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은희에게는 무력을 행사하는 커다란 돌처럼 보이던 오빠가, 비극에 앞에서는 몸집 작은 중학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때 깨닫는다. 영화는 성수대교 붕괴라는 한국 사회의 보편적 상처를 개인적 사건으로 들추어내어 어루만진다.


지금도 여전히


 영화가 시대를 다루는 방식은 상당히 개인적이지만, 너무 개인적이라 보편적이기도 한 것 같다. 그 시절을 살아간 은희가 아픈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 시절 모두가 그렇게 아팠을 것이다. 2019년을 살아가는 지금 사람들도 다 아픈 것 같다. 나는 1994년의 순간들을 보면서 끊임없이 2019년을 생각했다. 25년 뒤에 지금 이 순간을 돌이켜도 그만큼 아플 것 같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나 아는 비밀, 비밀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