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오빠들이 오빠 노릇 못한 거야.
아빠한테 연락이 왔다.
"할머니, 곧 수술하신대. 설날에 찾아뵙지 못할 테니 이번엔 갔다 오자."
할머니와 특별한 정이 있진 않지만, 병원에서 큰 수술을 하신 후 코로나가 겹쳐 못 뵌 지 1년 정도는 넘었다. 또 큰 수술을 앞두고 있다고 하시니 마음에 걸려 무거운 몸을 이끌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1시간 정도 걸리는 할머니 댁엔 시집가지 않은 50대 큰 고모, 장가가지 않은 50대 삼촌이 같이 살고 있다. 더불어, 위층에는 작은 고모네도 있기에 할머니 댁 가면 친척들의 50% 이상을 볼 수 있다.
아빠와 내가 먼저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보는 큰고모의 낯빛이 많이 피곤해 보였다. 삼촌은 방 안에 틀어박혀 바둑을 하며 담배만 피워댔다. 할머니는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다.
'아! 더 이상 집이 아니구나.'
병실보다도 못한 답답함이 진동을 했다.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작은 방으로 피신해 버렸다. 이런 숨 막히는 분위기는 아직 피하고 싶었다. 조금 있다가 큰아빠가 오셨다. 곧, 아빠가 고모에게 밥을 안 먹고 왔다고 말했다. 밥 차리라는 얘기였다. 큰 고모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이럴 때는 밥 먹고 오는 게 예의야."라고 딱 잘라 말하며 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냉동실에서 진공 포장된 LA갈비를 꺼내 해동시키고, 쌀을 씻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할머니의 잔소리도 시작됐다.
"거기, 반찬 있잖아. 저거 김치 꺼내."
"저거 물을 어떡할 거야."
"상 좀 닦아."
할머니의 잔소리에 큰고모는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좀 냅 둬!!"
신경질로 답했다. 큰 고모의 신경질은 모녀의 짤막한 냉전이 아니었다. 이골이 난 싫증, 악, 분노 그 자체였다. 구질구질한 이 집구석에서 쌓인 울분이었다. 큰 아빠도, 우리 아빠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이내 할머니도 잔소리를 멈추셨다. 집 안은 조용했다.
밥이 다 차려졌다. 작은 고모가 아들과 함께 할머니 댁으로 내려왔다. 큰아빠, 아빠, 삼촌의 고기 뜯는 소리만 가득했다. 큰 고모는 고기가 끊기지 않게 밥도 못 먹고 혼자 부엌에서 일만 했다. 거북목이 심해 어깨도 같이 올라간 고모의 뒷모습은 버거워 보였다. 미안함에 도와줄까 일어섰지만 고모는 굳이 일하지 말라며 나를 앉혔다. 앉아서 멍청하게 고기만 기다리고 있는 남정네들의 모습은 소리 없는 공포였다. 작은 고모는 아들의 밥에 고기를 올려주며, 나에게 하소연을 시작했다.
"나는 밥만 차리다가 그냥 하루가 끝나. 아침에 아들이랑 신랑 밥 챙겨주고, 위층 올라와서 할머니 챙겨주고, 그러다가 또 애 간식 차리고, 할머니 점심 챙겨주고. 저녁에 되면 또 밥 차려주고 할머니 챙겨주고. 그러면 삼촌이 꼭 방안에 있다가 나와. 돈도 안 보태주면서 꼴 보기 싫어 죽겠어."
작은 고모의 하소연은 아까 큰고모의 신경질과 다름없었다. 이미 일상에 이골이 난 상황이었다. 큰고모와 작은 고모는 할머니와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딸이라는 의무감에 챙겨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더불어, 노가다를 뛰고 집에 온 후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삼촌까지 더해져 할머니가 2명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삼촌을 만든 건 할머니라는 이야기까지. 작은 고모는 삼촌을 국해놔도 데워먹지 않고 라면 끓여먹는 사람이라고 일축했지만, 아빠는 삼촌 것까지 뭐하러 챙겨주냐며, 내버려두라고 얘기했다. 이야기의 본질도 모른 채 이상한 말만 덧붙이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엄마와의 이혼에 감사했다.
작은 고모는 한 껏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내더니, 조금 과했나 싶었던 지 이런 말을 했다.
고모나, 큰 고모나
이 집에서 딸들은 다 악녀야
작은 고모의 내적 갈등이 여실히 느껴졌다.
어떻게 보면 큰고모와 작은 고모만이 할머니를 케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보기만 해도 속 터지는 노총각 삼촌까지 있으니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쉽지 않은 일이다. 경제적으로라도 넉넉하면 모를까, 큰고모는 보험일을 하고, 작은 고모는 고모부의 벌이로만 근근이 먹고 사는지라 부담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할머니의 히스테릭한 잔소리까지 더해지니 말이 곱게 나갈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따금씩 할머니에게 모질게 구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느껴졌다. 참, 안타까웠다. 이렇게나마 고모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러 왔음에 오늘 여기 온 일이 잘한 일이라 느껴졌다. 나는 말했다.
아니, 고모들이 무슨 악녀야. 오빠들이 오빠들 노릇을 못하는 거지.
딱 잘라 말했다. 어디서 이런 말 할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분위기는 그야말로 갑분싸.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차마 손가락질은 못하고) 손바닥으로 큰아빠, 아빠, 삼촌을 가리키며 반복했다. "오빠들이 도와주는 게 뭐가 있어. 오빠들 노릇 못하는 거지. 오빠들 노릇 못하니까 고모들이 버거운 거야." 다시 한번 갑분싸.
큰고모도 작은 고모도 나의 말에 아무런 대답 하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버르장머리 없게 어디 그런 말을 하냐고 말했을 아빠였을 텐데 아빠도 가만히 있더니, 뜬금없이 나에게 "그럼 너는 손녀 노릇했어?"라고 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대답하지 않았고 그렇게 상황은 무마됐다.
밥을 다 먹은 뒤, 큰고모는 할머니 병원비에 대해 얘기했고, 삼촌은 자리를 피해버렸다. 아빠는 없는 돈을 끌어서라도 보태겠다고 약속했으며 결국, 돌아 돌아 끌어오는 돈은 내 돈이 되고 말았다. 결말이 참 뭐 같지만, 작은 고모나 고모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 듯, 나 역시 아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브런치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외가 쪽 이야기에 억장이 무너져서였는데, 사실 친가 쪽 역시 암울하긴 그지없다. 더 마음이 아픈 건, 외가 쪽엔 돈에 눈이 먼 못된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친가 쪽은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사실 친삼촌도 원래 그랬던 건 아니다. 삼촌이라는 단어가 나에게 긍정적인 이유는 친삼촌이 말은 없어도 속내가 따뜻한 사람이라는 게 느껴져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돈도 떼이고, 아무리 일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어느 순간부터 그늘져갔다. 큰아빠 역시 참 순수하고 좋은 사람인데 세상 물정을 몰랐다. 큰고모는 좋은 대학과 좋은 학과를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집안에서 여력이 안되어 이어갈 수 없었고, 오빠들의 뒷수습을 도맡아 했다. 작은 고모는 학생운동을 할 정도로 열정이 넘쳤던 사람이지만, 고모 역시도 이 상황에 같이 찌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찝찝함을 털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나에겐 다 좋은 고모, 삼촌, 큰아빠, 할머니셨는데. 한 평생 속고만 산 사람들의 결말 같은 느낌이랄까. 외가 쪽의 이야기를 담아낼 때와는 또 다른 답답함이 나를 짓누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이렇게 또 이 일화를 남기는 이유는 지리멸렬한 삶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젠장 진짜 부자가 되고 싶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하고 또 한 번 외친다. 기록하면서 내 불행이 내 삶에 자극제가 되더라. 더군다나 남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걸 댓글을 통해서 그리고 몇 안되는 메일을 통해 깨달았다.
내 삶에 공감했다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저 내 이야기를 내가 답답해서 쓸 뿐인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또 다른 기록의 이유로 다가왔다. 때로는 나와 비슷한 불행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잘 살아가고 있음에 용기를 얻게 되고, 때로는 남의 불행과 나의 불행을 저울질해보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내 글이 어떻게든, 어떤 형태로든 남의 행복에 이용당하길 무척이나 바란다. 저울질을 당하든 용기가 되든! 갑작스럽지만 이 글을 통해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21년 제 글이 한 번이라도 이용당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