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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 May 14. 2023

책이 필요한 사람

내가 책을 가까이하게 된 여러 계기가 있지만 아마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대학 시절 주말 근로자로 약 2년 6개월 동안 도서관에 몸담았던 시간일 것이다. 도서관에서 일을 하다 보면 근무 환경상 보고 닿는 것이 모두 책이다. 책이 밉다는 사람을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사람마저도 미운 정이란 게 생길성싶은 환경이다. 나라고 그 책들 속에서, 아니 정확하게는 존재만으로 자신을 읽어보라 권유를 해오는 그 책들 속에서 뭐든 하나라도 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정식 사서가 아니었기에 주된 업무는 책을 대출해 주거나 반납 받는 것이었고 그나마 더 한다는 일도 다른 도서관으로 보내거나 혹은 우리 도서관으로 올 책들을 확인하고 정리하는 게 전부였다. 일이 이렇다 보니 생각보다 틈이 나는 시간들이 많았는데 당시 근무하시던 주사님들의 배려로 그 시간에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소설을 찾았다. 바야흐로 말년 병장 시절, 지루함만 가득한 내무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소설책을 읽는 것이 전부였기에 그 버릇이 아직 유효하다면 또 읽히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1절 혹은 1부를 넘기는 책이 없었다. 소설이 지루한 탓도 아니었고 아예 관심 없는 시대극이나 추리 소설을 읽은 것도 아니었다. 얼마 안 가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는데, 우연히 반납된 산문을 읽게 되면서였다.




모든 산문이 그러한 것은 아니나 대부분 글 한편의 길이가 대단히 길지는 않다. 적어도 소설의 한 절보다는 짧을 것이다. 그렇기에 읽는데 부담이 없다. 여기서 ‘부담’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산문에 비해 소설을 읽는 것이 부담된다며 한 쪽을 낮추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도우 작가의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를 읽고 ‘이런 소설이 부담 없이 읽히는구나’ 하며 무릎을 친 전례가 나 또한 있기 때문이다. 다만, 도서관에서 일 할 당시에 나는 그동안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러웠던 것들, 예를 들어 현재 내용을 이해하는데 앞에 내용을 끌어오는 과정이나, 무수히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나, 그 인물마다 존재하는 서사를 한 데 엮는 과정들이 좀처럼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부담을 덜어내고 읽은 산문은 내 생각보다 그 세계가 다양했다. 그래서 입맛대로 골라 읽을 수 있었다. 갑자기 사랑 타령을 하고 싶을 때는 외사랑이나 사내 연애, 대학 연애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러다 또 어느 날은 글쓰기가 잘 하고 싶어 은유 작가의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같은 내 글쓰기 선생들의 책을 읽었다. 아, 새 학기 면 초등학교 저학년을 둔 학부모들이 빌려 가는 ‘무슨 무슨 아이로 키우기’ 류의 책도 내 기준에는 제목이 다소 폭력적이라 그 내용이 궁금해 종종 읽었다.




시간이 지나자 산문에도 손이 가질 않았다. 소설을 읽지 못했던 것처럼 또 그 시기인가 싶어 아예 생뚱맞은 경서나 과학도서에 도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평소 책을 사랑하는 지인에게 이 고민을 털어놓자 그가 말하기를 그것은 일종의 ‘책태기’라고 했다. 책과 권태기가 만나 만들어진 합성어 책태기는, 별다른 이유 없이 책에 손이 잘 가지 않고 그렇게 권태기가 온 연인들 마냥 대상에 무신경해진다는 것이다. 단지 권태기와 차이가 있다면 책태기는 오직 일방적으로 독자만의 몫이다. 이에 해결할 방도를 묻자 지인은 그냥 두라고 했다. 어차피 곁에 두어도 읽지 않을 거라는 게 골자였고 그러지 말고 이참에 다른 취미를 가져보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독서 말고 다른 취미는 운동뿐인데 그마저도 부상의 여파로 몇 년째 하지 못하고 있으니 정말로 지루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시간은 언제나 제 몫을 하듯 아무리 지루해도 흘러갔다. 그간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실패하고, 끝내 도망치듯 전주를 벗어났다. 첫 달과 그 다음 달은 어찌 여행도 다니고 사람도 만나며 괜찮다 스스로 다독였지만 모아둔 돈이 떨어질 때가 다가오니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삶에서 무언가 틀어지긴 한 것 같은데 이를 어떻게 맞춰야 할지도, 그게 가늠이 잡힌들 해결하고자 하는 의욕도 없었다. 무기력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초조함이 들어서면 별일도 아닌 것이 살결만 스쳐도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화가 나는 등 몸과 마음을 예민하게 한다. 가족에게 모진 말을 했던 것도, 세상을 냉소적으로만 바라본 것도 그때였다. 그러다 하루는 광주에 갈 일이 있어 짐을 챙기던 중 복사기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책이었다. 사둔지는 오래됐으나 저자의 문체와 글 한편에 담긴 방대한 정보량에 피로감을 느껴 덮어둔 책이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내 손은 이미 책을 들어 가방에 담고 있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그날은 춘분(春分)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이었다. 사람에게 밤이란 것이 다 고달픈 것은 아니겠으나 분명 마음 저 속까지 쓰라린 밤은 다음날 뜨는 낮이 아니고서야 달랠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안다. 우연히 책을 다시 손에 잡은 날이 춘분이었는지, 춘분이라 다시 책을 손에 잡았는지 그 우선은 알 길이 없다. 다만 나에게 책은 춘분을 기점으로 여태 나를 쓰리게 했던 밤을 잠재웠고 이튿날부터는 다시 낮이 길어지기 시작한 것만은 분명했다.




이후 하루 종일 책을 붙들고 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는 자연스레 나를 보며 책을 참 좋아하는 것 같다 말해주었다. 그런데 그 말이 영 와닿질 않았다. 소설을 지나 산문을 읽을 때도, 처음 겪은 책태기도, 이윽고 맞이한 춘분의 기적도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없었을 날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의하는 ‘좋아한다’는 건 무릇 늘 곁에 두고 싶은, 그렇게 두면서도 자꾸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기에. 그러니 나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이 필요한 사람에 더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연전에, 사랑했던 사람에게 귓속말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네가 필요해’. 그때야 생각이 많이 어렸기에 단순히 사랑을 받고 싶어 한 말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아마 당신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다는 마음을 그렇게 밖에 표현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니 같은 마음으로, 나는 삶을 더 살고 싶을 때마다 책에게 속삭인다. 나는 네가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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