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유품, 가계부에 남긴 글

엄마를 추억하며

by 하늘아래

어머니 유품, 가계부에 남긴 글


어머니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몇 주째 유품을 정리했다. 쓰시던 솜이불과 옷가지들을 분리해 일부는 이모님들께 보내 드리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버렸다. 몇 가지는 그냥 두자고 아버지가 말리셨다. 장롱 옆에 따로 정리해 두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한가득이다. 아버지는 아직 어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하신 듯했다. 그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외골수였고 자존심이 강하셨다. 그러면서도 속은 철 모르는 소녀처럼 여리셨다. 열심히 교회에 다니는 분은 아니었지만 늘 기도하셨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나 부처님으로 특정하지 않으셨다. 늘 ‘하늘’이었고, “~~하게 해 주소서”라는 형식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문장처럼 반복하셨다. 기도의 내용은 언제나 자식과 손주들의 건강과 평안이었고, 때로는 뉴스를 보며 나라를 위해 기도하시기도 했다.

군대에 있을 때 어머니는 모나미 볼펜을 꾹 눌러쓴 편지를 보내주셨다. 한때 우울증에 빠져 군대 시절 사진을 모두 불태운 적이 있는데, 그때 어머니의 편지도 함께 소각해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못내 아쉽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언젠가는 쓰겠다며 사 두고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그릇과 옷가지들을 마주할 때마다 눈물이 핑 돈다. 이게 뭐라고, 한 번쯤은 원 없이 쓰시지 그러셨을까 싶어서다.


아버지는 어디에서 찾았는지 어머니가 쓰시던 가계부를 잔뜩 내놓으셨다. 넘겨 보니 금전출납 기록 사이사이에 잡다한 글들이 적혀 있었다. 아마 돈 계산을 하다 따로 적을 곳이 없어 떠오르는 대로 써 내려간 듯했다. 대부분은 신문이나 책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옮겨 적은 것이었고, 간혹 편지처럼 혹은 생각이 흘러가듯 쓴 글도 있었다.


문장에는 비문이 많았지만 읽다 보니 어머니가 평소 쓰던 어휘와 호흡이 그대로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계부에서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신기한 것은 또박또박한 손글씨로 쓰여 있으면서도 고친 흔적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말하려던 것들이 글로 옮겨지기 전에 이미 마음속에서 정리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늘 글을 쓰는 분이셨다. 그중 유독 마음을 울리는 글이 하나 있었다. 제목은 ‘고향집’이었다. 어색한 어휘가 있더라도 최대한 그대로 옮기고 싶었다. 1989년 12월,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의 기록이다.





고향집


십 년 만에 고향집을 찾아갔다. 용산에서 고속버스로 세 시간, 자식들은 객지에서 살고 지금은 부모님 두 분만 고향집을 지키고 계신다. 자식들 따라 도시로 나와도 되시련만 그 얼마 남은 부동산, 대로 물려받은 살림, 지금 현실 보잘것없지만 몇 가마씩 담을 수 있는 큼직한 독야지가 몇 개 그런 것들을 내버릴 수 없으니 돌아가시는 날까지 고향집을 지키고 계실 것이다. 형제들이 서울에 살고 있어 가끔은 올라오신다. 우리는 안양으로 이사 오면서 생활고로 남편과 떨어져 주장없이 살다 보니 찾아뵙기가 어렵고 또 자식들 집에 오시면 뵙게 되니 생신이나 명절 때 동생들이 내려가게 되면 그 편에 잘은 못해도 조금씩 성의를 표하니 고향에 직접 다니러 가기는 오랜만인 것 같다.

더구나 작은 아이 대학입시 합격자 발표일이 24일인데 기쁜 소식 듣고 다녀오려 했는데 작은아이가 “엄마, 시험 친 가능성이 십중팔구 틀림없는 것 같으니 안심하시고 이모들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 뵙고 오세요. 합격이든 불합격이든 전화로 연락드리겠으니 다녀오세요. 저로 인해 많은 걱정 하신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오랜만의 시골집 가서 쉴 겸 얼른 다녀와요. 내일 아침 발표보고 즉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아마도 오랜만에 엄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 될 것 같습니다.” 간곡한 부탁이었다. 발표일 하루 앞두고 다녀오기는 어수선한 마음이지만 아이가 노력한 대가로 보아 틀림없다는 믿음에 안심이 되어 나섰다.

내 친가는 삼대에 걸쳐 그야말로 산골토박이다. 부모님은 아직까지 산골에 계시고 형제들은 결혼해서 각자 직장따라 도시에서 살고 있다. 고향집은 버스에서 내려서도 2킬로쯤은 걸어야 한다. 산골이지만 시대가 발전하여 어린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여 초가집은 찾아볼 수 없이 스레뜨나 기와로 개량했다. 앞 큰길에도 하루 몇 번씩 버스가 다닌다. 도시 생활이 몇 해나 되었는지 옛 생각이 났다.


시골 풍경은 여전히 초라하고 쓸쓸해 보였다. 버스 유리창으로 바라보는 고향 산천,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집들이 마치 어떤 그림에서 본 넓은 바다에 하나둘씩 떠 있는 나룻배 같아 보였다. 고향집 뒤 야산의 사철 푸르렀던 소나무는 농토를 만들라는 정부지시에 따라 푸른 나무는 없어지고 잡풀만 무성하니 더 막막해 보였다. 도시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좋은 집도 마구 부셔 몇 층으로 올리고, 그린벨트 자연 녹지에 빽빽이 APT를 세우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눈이 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시던 옛 분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도시 생활 십 년에 부엉이 서쪽새가 울던 고향집은 앞으로 찾아볼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 형제들이 자랄 때는 이 동네에서 부자소리 듣고 살았건만 만지고 가꾸는 이 없으니 넓은 뒤꼍 아래채 큰 광에는 퍼렇게 이끼가 끼어 잘못 디뎠다가는 넘어질 염려가 되었다.

어머나 깜짝! 옛날이나 지금이나 개는 기르고 있었다. 집 앞 대문에 이르니 토산 종자 멍덕개가 우리를 보고 고을이 들썩이게 짖어댄다. 미리 연락을 드리고 갔기에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몇 분 전에 대전에 있는 동생도 와 있었다. 서울에 가끔씩 오셔서 뵈올 때는 우리 어머니는 늙으셔도 곱사하게 늙으시는구나 이렇게 보았는데 크고 텅 빈 집에서 보니 어머니 모습이 파리해 보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팔십이 넘은 고령, 인생의 하반기에 무덤으로 가는 길, 남은 인생이라도 잘살아 보려고 노력하시는 어머니는 나를 보고 쏟아지는 눈물을 참으셨다. 말씀하실 때마다 “우리 두 늙은이는 지금 죽어도 복이다. 너희가 잘 사는 것 보았으면 이것으로 만족이지 더 바랄 게 없다.”하신다. 언제나 자식들 걱정이다.

우리들이 사 가지고 간 음식도 많았지만 날씨도 추운데 고루고루 많이도 준비해 놓으셨다. 5일마다 돌아오는 장날이면 어머니는 직접 못 가시면 이웃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부탁하거나 집에서 전화로 배달을 부탁하며 이렇게 지내시고 있다. 맏언니가 가까운 곳에 살고 있어서 자식들을 대표하고 있다. 생신이나 명절에 언니는 두 몫을 하고 있다. 우리들이 내려간다는 연락을 언니에게 미리 전화로 알리면 언니는 농사짓는 가정이라 농산물로 푸짐하게 차려 놓고 기다린다. 웃음꽃이 피어난다. 언니나 형부에게 늘 고맙고 미안하다.

날씨가 춥든 덥든 어머니는 우리를 보고 “너희들이 왔으니 하거라” 이런 말씀이 없고 언제나 이전처럼 손수 하신다. “오랜만에 너희들이 왔으니 부엌일이 서투를 것이라 어려워도 내가 직접 하는 것이 편하다”하신다. 우리는 어머니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라 편히 쉬고 오게 된다. 고추장, 간장, 된장이 아직도 옛 맛이고 조미료는 잘 쓰지 않는다. 나물무침도 옛날 그 맛이다. 고추장은 빛깔도 맛도 변함없다.

“음식맛도 이제는 모르겠더라. 그냥 이전에 하던 짐작 대중으로 간을 맞추지만 이웃 젊은이들이 가끔 와서 먹어 보고 간이 착 맞는다고 하더라. 객지 생활하는 자식들에게 흉 되지 않게 하려면 늙을수록 깨끗해야 한다. 가정생활도 중요하겠지만 의복 매무새가 다정해야 한다”

친정아버지께선 십 년 전부터 중풍으로 왼편을 잘 쓰지 못하시고 뙤똑뙤똑 걸으신다. 약치료 하셨지만 노후증세로 치료가 무효하다. 어머니가 손발이 되어 잠시도 쉴 틈이 없다. 몸은 팔십이 넘은 백발이지만 마음은 아직도 옛 젊으신 마음 그대로 간직하시고 젊은이들보다 더 소홀한 빛이 없으시다. 가끔이라도 도와드리지 못하는 것이 죄스럽다. 어머니는 어떤 때는 냉정하고 무서운 분이지만 한편으로는 인정 많고 따뜻한 눈물 많은 분이시다.

어머니는 어릴 때 부유한 집에서 자라나 부유한 가정으로 시집와서 남들 보기에는 부잣집 며느리로 부러워 보였겠지만 고생이 많으셨다. 아버지께선 무남독자 외아들, 부모님 유산이 많아 젊으셨을 때는 화랑 못지않은 생활을 하였고 지금까지도 손끝하나 움직이실 줄 모르시고 지내신다. 까다로운 성격과 식성, 아무튼 별난 분으로 손꼽히는 분이셨다. 우리 칠 남매에게 특별한 교육은 못하셨지만 그런대로 잘 가르쳐서 모두 결혼해 잘들 살고 있다. 나는 둘째 딸로 지금 세 아이의 엄마로 행복한 편이다.

어머니는 바느질 솜씨와 음식 솜씨가 특별해 집안이나 이웃 동네 경사가 있으면 특별초대를 받아 손님상을 차리고 시집가는 색시 웃옷, 신랑 두루마기를 만드셨다. 그것도 재봉틀이 아닌 손바느질, 인두불, 골무를 차고 바느질을 하셨다. 우리 형제들이 다 커서도 외출복은 어머니가 만들어 입히셨다. 아버지 한복은 아직까지 손수 꿰매신다. 대중으로 하신다고 했지만 다리미 질 솔기하나 틀림없다. 삼 년마다 돌아오는 윤달이면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집에서는 돌아가시는 고인을 위해 수의를 만든다. 두루마기 중단 도포 원삼 사소한 것 몇 가지 더 장의사에게 사오지만 옛 것 아시는 분들은 좋은 천으로 잘 만들어서 고인을 모시게 된다. 지금도 윤달이면 여기저기서 택시로 어머니를 모시러 온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손수재단 얌전하게 가르쳐주시고 재단하여 꿰매주시고 오신다고 한다. 어머니 생전에 좋은 점은 배워 두어야 하는데 그런 데까지 생각은 못하고 있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내가 살던 산골집. 까치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새벽에 수탉 우는 소리, 우물에서 물 긷는 타래박 소리, 이 모두가 고향의 소리로 어머니의 목소리같이 들렸다. 어머니는 백날을 하루 같이 자식들에 대한 걱정이시니 어머니 사랑만큼 뜨거운 사랑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 남은 인생 일도 건강하게 사세요.

1989년 12월


엄마의 친필


매거진의 이전글생광스러운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