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왜 걸으려고 할까?

마태복음14:22~33

by 하늘아래

물 위를 왜 걸으려고 할까?

마태복음14:22~33


성경(관련 마가복음 6:45~52, 요한복음 6:16~21)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태복음14:22~33)




CCM 중에 ‘물 위를 걷는 자’란 노래가 있다. 가사의 일부는 이렇다.

주님 나를 부르시니 두려움 없이 배에서 나아가리라 / 주님 나를 부르시니 주님 내게 오라시니 주님 보고 계시기에 의심치 않고 바다를 걸어가리라

이 노래의 배경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자 했던 마태복음 14장의 내용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가만히 노래의 가사를 보면 성경의 내용을 인위적으로 왜곡한 부분이 있다. 예수가 베드로를 물 위로 오라 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예수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걷게 할 마음이 없었다. 베드로가 예수를 시험하여 물 위를 걷도록 요청한 것이다.

본문의 일부를 대화로 구성해 보자.

(갈릴리 바다에 광풍이 불어오고 제자들은 노를 젓기도 힘든 상황에서 배가 뒤집힐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것을 아신 주님이 새벽녘 물 위를 걸어 다가왔다. 제자들은 유령이다를 외치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다.)
A 예수: 얘들아 내가 왔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B 베드로: 당신이 주님이 맞다면 나한테 명령해서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해 보세요

당신이 베드로라면 예수에게 뭐라고 말해야 정상일까? 적어도 정상적인 제자라면 “아이고 예수님 왜 지금 오십니까? 이제야 우리가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베드로는 엉뚱하게 그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이 예수처럼 물 위를 걷기 원하였다.


이 본문에 앞서 마태복음 8장에도 예수가 바다에 풍랑이 일어 배에 덮치는 것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 책망하며 바람을 꾸짖어 잔잔하게 했던 내용이 나온다. 베드로는 이미 예수가 풍랑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예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또한 마태복음 14장 초반의 내용으로 알 수 있듯이 제자들은 예수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기적을 목도했었다. ‘예수가 우리를 살려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제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일렁이는 물결에 배가 뒤집혀 죽게 될 상황에서 개인적으로 예수의 권능을 시험하고자 했다. 이번에는 풍랑을 멎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물 위를 걷게하는 시험이다. 제자들을 위험에서 구하는 것과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베드로의 행동을 보고 불가능한 믿음에 도전하는 신앙으로 본받아야할까? CCM 가사에서 ‘주님 보고 계시기에 의심치 않고 바다를 걸어가리라.’라는 고백은 참 무모해 보인다. 바다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이라면 어떤 광신적인 행위도 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 말은 주님이 원하시지도 않는 목표를 마음대로 정해 놓고 마치 그것이 주님의 뜻이고 믿음인 양 선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한 유튜브의 섬네일에서 “물 위를 걷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는 신앙인의 모델”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고 머리가 띵해졌던 기억이 있다. 과연 그런 걸까? 물 위를 걷는 행위는 예수가 의도한 상황이 절대 아니었다. 예수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물 위를 걸으라고 명령하실 분이 아니다.

* 일부 고대 문헌에서는 오만한 자들만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묘사했다. 예를 들어, 칼리굴라(Caligula)는 푸테올리(Puteoli) 만 위에 다리를 건설할 때 “바다의 주인처럼” (요세푸스, 고대사, 19:5~6)이라고 표현했다. 마카베오기(Maccabees) 하편 5장 21절은 안티오쿠스(Antiochus)가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라는 오만한 생각을 했다고 묘사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는 의미를 몰랐을까? 황제도 아닌 베드로가 물 위를 걸으려고 했던 것은 지극히 오만한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신약학자 김호경 교수는 이 부분을 이렇게 해석했다.

“믿음과 욕망은 분리하여야 합니다. 큰 믿음이 큰 욕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물 위를 걷는 믿음이 이 상황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제자들이 탄 배가 뒤집혀 죽게 될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순전히 베드로 개인의 욕망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김호경 교수 말씀 나눔 중에서)

배에 같이 있던 제자들은 베드로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물 위를 걸어온 예수에게 부탁할 당면 과제는 파도를 다시 잠잠케 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라고 한 것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음에도 두려워하다가 물에 빠진 것을 탓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구주 됨을 스스로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나니 두려워말라(마14:27)”에서 ‘나니’는 ‘에고 에이미(Ego Eimi)’란 의미로 동일 본문을 수록한 마가복음이나 요한복음에서도 공통으로 등장한다. 특히 요한복음은 이 본문의 내용 다음에 예수가 생명의 떡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유월절 오병이어가 출애굽의 시작을 의미하고, 새벽녘 파도치는 바다를 건너가는 제자들의 행위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넘어 생명과 약속의 땅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예표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의 능력을 시험하여 물 위를 걷고자 한 내용은 유독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사실 베드로 이야기는 전체 흐름상 빠져도 되는 어색한 설정이다. 배가 뒤집히게 되었는데 혼자 물 위를 걷고자 하는 한 제자의 일탈행위를 누가 신앙의 모범이 되는 상식적인 행위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 베드로를 등장시킨 이런 무리한 설정은 마태복음이 다가올 16장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 천국의 열쇠를 받게 되는 극적인 연출과 그 권세가 교회 구성원 모두에게 확대되어 발전하는 18장의 클라이맥스를 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마태복음은 베드로의 부족함을 지속적으로 드러내며 교회 공동체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강조한다. 천국의 열쇠는 베드로 한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었다. 그 특권은 '너희'로 명명되는 교회 공동체 누구에게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 특권이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7)

예수는 베드로 한 사람이 물 위를 걷는 능력을 위대한 믿음의 징표로 보여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 당신이 주님이라면 나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해 보라는 당찬 부탁은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자신도 기적을 행하고 싶은 비이성적인 욕망에서 비롯하였다. 우리 누구도 평소에 물 위를 걸어야 할 일은 없다. 이 사건은 믿음의 결단이 그렇게 큰 것이 아님을 보여주려는 해프닝에 가깝다. 핵심은 교회가 하나님을 뜻을 실천하여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작은 자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는 것이다. 예수에게는 그런 행동이 물 위를 걷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이다. 예수는 절대 우리 보고 물 위를 걷는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다. 마태복음 18장에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끝없는 관용을 강조한다. 마태복음의 큰 그림은 유대교와 달리 예수 공동체가 교회로서 종말의 시대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마태복음 14장은 잘못 해석하면 노래의 가사처럼 “주님 보고 계시니 의심치 않고 바다를 걸어가리라”는 당찬 믿음의 고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 위를 걷고자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는 그릇된 욕망과 기복적인 신앙에 다름 아니다. 믿음은 그런 데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혐오, 아집에 사로잡혀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 불가능한 사랑은 자신의 욕망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위대한 기적이다. 우리는 물 위를 함부로 걸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런 분은 예수 한 분이면 충분하다. 신약성경의 수많은 이야기는 물 위를 걸어가는 천상의 신화가 아니라 일상에서 사랑으로 믿음의 삶을 살아내라는 권면이다.

“아가페는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고 주는 사랑입니다. 그것은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입니다. 아가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대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조건을 내걸지 않으며 무조건적으로 부어집니다. 아가페는 시대에 대한 도전입니다. 아가페를 일반적 사랑의 단어로 사용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김호경, 『신약수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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