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의 경이로운 연주
“비발디의 《사계》 전곡이 일반 청취용 음반으로 제작된 것은 1948년 미국에서였다. 음반제작을 주도한 사람은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할리우드 영화음악 전문 지휘자였던 루이스 카우프만(Louis Kaufman)이었는데, 이 음반이 1950년 프랑스에서 최우수 클래식 음반상을 받으면서 유럽과 미국에서 비발디 붐의 역할을 했다” 정시몬《클래식브런치》 p.32 중에서
정시몬이 언급한 루이스 카우프만은 《사계》연주보다 1930년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같은 할리우드 대작의 영화음악 연주자로 더 유명합니다. 비발디 붐을 일으켰는지 사실 좀 의심스럽지만 비발디의 악보를 찾아내어 그걸 《사계》라는 이름의 음반으로 제작했다는 건 나름 참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쉬운 건 카우프만의 연주를 지금은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가 녹음한 《사계》는 현재 낙소스 레이블에서 희귀 음원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사계》는 모두 독립된 3악장 곡으로 따로따로 감상하던 것이었어요. 비발디의 작품을 정리한 리욤번호를 보면 계절순으로 각각 RV269, RV315, RV293, RV297로, 원래부터 순서대로 모을 생각을 안 했던 것이죠. 사실 계절별로 소네트가 붙어 있다고는 하지만 연주만으로 계절을 구분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봄은 그렇다 치고 겨울이 여름 같고, 여름이 가을 같고, 가을이 겨울 같고 하거든요. 스트라빈스키가 비발디를 혹평하면서 “100개나 같은 협주곡을 썼다”라고 한 것도 이해가 되는 대목입니다. 《사계》는 바이올린을 좀 한다는 연주자는 누구나 다 시도하는 레퍼토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정경화나 사라장 같은 수준급 연주자의 음반이 이미 나와 있어요. 《사계》 앨범은 발매된 것만 400여 중이 넘는다고 해요. 비발디의 협주곡만큼이나 많은 숫자입니다. 그래도 나름 질적으로 우수한 전설의 앨범은 존재합니다.
1. 이게 바로 《사계》야 - 이 무지치(I Musici)
지금까지 8000만 장이 넘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자랑하는 《사계》 앨범이 있습니다. 바로 이탈리아 실내 합주단인 “이 무지치(I Musici)”가 연주한 《사계》입니다. 그야말로 고전적인 명반입니다. 1959년, 음반회사 필립스는 “이 무지치(I Musici)”의 《사계》를 발매했습니다. 바이올린은 펠리스 아요(Felix Ayo)가 맡았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 앨범은 필립스 음반사로부터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 레코드를 받으며 카라얀과 베를린필하모닉의 베토벤 ‘교향곡 5번’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반이 되었습니다. 이 앨범을 시작으로 이무지치는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를 대표하는 실내악단으로 등극했어요. 제가 들어본 《사계》 중에서 가장 서정적이면서 차분하고, 격정적이면서 고풍스러운 연주입니다. 특히 리듬의 절제와 조화된 선율은 “이게 바로 《사계》야”란 말이 절로 나옵니다.
이 무지치는 《사계》 앨범을 악장이 바뀔 때마다 여러 번 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잊을 만하면 2년에 한 번씩 내한공연을 왔었고 그 덕에 유튜브를 통해서도 이무지치의 연주를 깨끗한 화질로 감상할 수 있어요. 2016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한 실황을 보시면 바이올린을 담당하는 악장은 가장 왼쪽 끝에 앉아서 곡의 모든 절주를 컨트롤합니다. 시계방향으로 바이올리니스트가 총 6명, 비올리스트가 2명, 첼리스트가 2명, 더블베이스가 1명 그리고 반달모양의 좌석 배치 뒤로 쳄발로 주자가 1명 있습니다.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 편한 것은 곡을 듣는 사람일 뿐이고 연주자들이 얼마나 혼신을 다해 현악기의 활을 움직이는지 알게 됩니다. 각 계절마다 빠름, 느림, 빠름 3악장의 단순한 구성 같지만 날씨의 변화처럼 연주는 다채롭기 그지없습니다. 특히 현악기를 리드하는 악장의 바이올린은 치렁거리는 머리칼만큼이나 쉴틈이 없어요.
2. 이게 바로 비발디야 - 에우로파 갈란테(Europa Galante)
30년이 지난 후 전설의 앨범이 한 장 더 등장합니다. 파비오 비온디(Fabio Biondi 1961년~)가 이끄는 에우로파 갈란테(Europa Galante)의 《사계》 연주입니다. 오스트리아에서 녹음하고 1991년 Opus111에서 발매한 이 앨범으로 《사계》의 연주시장은 난리가 났어요. 파비오 비온디는 곱고 가늘고 낭창낭창한 현악기의 선율을 과감하게 탈바꿈시켰어요. 다이내믹하고 충동적이며 정교한 프레이징, 자유분방함과 유연한 리듬의 절제는 “이게 바로 빨간 머리 비발디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에우로파 갈란테의 《사계》를 듣고 있으면 이탈리아 음악 특유의 화창함과 바로크 음악의 핵심이라 할 만한 역동성이 그대로 느껴집니다.
에우로파 갈란테의 2003년 ARTE 연주실황을 유튜브에서 보면 이무지치의 연주와 확연한 차이점이 느껴져요. 에우로파 갈란테는 기본적으로 원전악기 앙상블입니다. 4현의 첼로 대신 6현의 비올라 다 감바를, 그리고 18세기까지 유럽에서 널리 유행했던 기타와 비슷한 현악기 류트를 사용합니다. 연주하는 모습도 이채롭습니다.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자들이 닿을 듯 붙어 서 있어요. 쳄발로는 연주자의 뒤가 아니라 중심에 배치되어 있어서 연주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1악장과 3악장에서는 주로 베이스처럼 통주저음으로 챙챙 소리를 내며 연주의 중심을 잡아 주다가 서정성이 뛰어난 2악장에서는 신비스러운 음색을 내며 곡의 전반에 나서기도 합니다. 파비오 비온디는 이무지치의 악장처럼 한 곳에 머물러 앉아 있지 않아요. 연주자들 사이를 끊임없이 서성이며 바이올린의 차진 음색으로 연주를 리드합니다. 특이한 것은 파비오가 바이올린의 활대를 잡고 있는 모습인데요. 손이 활대 끝이 아니라 활대 윗부분을 쥐고 있어요. 그러면 활대가 바이올린의 울림통 위를 더 빠르게 오갈 수 있지요. 활대의 윗면을 활용하면서 활을 현에 강하게 밀착시켜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활의 힘을 세심하게 안배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강력하고 화려한 음색과 감각적인 비브라토의 비밀이 여기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정열적으로 질주하는 ‘겨울’의 제1악장을 듣고 있으면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는 것처럼 긴장감이 팽배하고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음색 자체가 거칠거나 과하지 않으니 듣고 있는 내내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CD 녹음이 매우 뛰어나요. 낭비되는 소리가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됩니다.
3. 바이올리니스트 양인모의 말
Q. 바로크 실내악은 솔로 바이올린이 지휘 역할을 겸합니다. 특히 비발디의 ‘사계’는 솔리스트에 따라 색깔이 크게 변하는데요.
A. 저는 비발디 음악의 활기찬 면을 표현하고 싶어요. 바로크 작곡가 중 비발디 음악이 가장 생동감 있고 흥미진진하거든요. 당시 예술의 중심지인 베니스의 분위기일 수도 있고요. ‘사계’는 비발디가 계절마다 실험한 효과가 다른데, 예를 들어 느린 악장인 2악장을 비교하면 ‘봄’에서는 잠든 양치기와 시냇물 소리, 강아지 짖는 소리가 함께 서정적 선율로 표현되고, ‘여름’에선 중간중간 폭풍우 소리가 나면서 연주자 간 소통이 중요해지고, ‘가을’에선 기괴한 화성들이 떠다니고…. 계절의 특징이 뚜렷해요. 또 비발디는 자신이 바이올리니스트인 만큼 바이올린이 돋보일 효과를 시도하는 걸 좋아했어요. ‘사계’의 유명한 도입부를 예로 들면, 합주 부분이 끝나면 바이올린 독주가 시작되도록 둘을 확실히 구분해 놓았어요. 독주 바이올린을 부각하려고요. 마찬가지 이유로 형식을 압축하고, 전조도 하고, 악절마다 바이올린의 역할을 부여했어요. 그걸 협주라는 형식에 녹여낸 게 대단해요. 바흐가 그의 협주곡을 직접 필사하며 “비발디는 내가 음악적으로 생각하는 법을 바꾸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죠.
2024 Noblesse 양인모 인터뷰 중에서
4. 겨울 2악장 – 헤어진 다음 날
《사계》에는 네 개의 2악장이 있습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악장이 있다면 겨울 2악장입니다. 첫 소절만 들어도 아름다운 선율에 귀가 쫑긋해집니다. 2악장 소네트에는 “불 곁에서 조용하고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동안 밖에서는 비가 만물을 적신다”라고 쓰여있다고 해요. 2분 남짓한 곳이지만 겨울 바깥 풍경을 묘사하기에는 충분해 보입니다. 현을 튕기는 피치카토 연주기법은 눈이 녹아 떨어지는 소리인 듯합니다. 베네치아의 연평균 기온을 보니 겨울에 해당하는 12월~2월에도 영하로 떨어지지는 않더군요. 겨울 1악장의 소네트에 “차가운 눈 속에서 얼어붙어 떨고...”등의 묘사는 다소 과장인 듯하나 비가 만물을 적신다고 한 2악장만큼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1998년도 봄에 이현우가 발표한 노래가 있어요. <헤어진 다음 날>이란 곡입니다. “날솨뢍 했나여~~~어허”라고 부르는 곡입니다. 이현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노래만큼은 미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 바로 곡의 도입 부분에 겨울 2악장을 샘플링했기 때문입니다. 밋밋한 가사와 곡에 300년 된 거장의 조미료를 가미한 덕분인지 <헤어진 다음 날>은 5주 연속 1위를 해서 골든컵을 받았습니다. 헤어진 다음 날과 눈 녹는 겨울 풍경은 어쩐지 참 어울립니다. 곡을 작사하고 작곡한 이현우는 한 방송프로그램에 나와서 “곡을 만들 당시 낮시간 텔레비전에서 화면 조정 시간이 뜰 때 비발디의 사계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왔어요. 저걸로 음악을 좀 만들어 봐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이 바로 <헤어진 다음 날>이 되었어요”라고 말을 했어요. 보통 신곡을 들을 때 사람들은 2초 정도만 귀를 기울여줍니다. 그런데 <헤어진 다음 날>에서 비발디의 겨울 2악장은 무려 도입 35초 동안 아름다운 선율, 그대로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가사가 이어집니다. “그대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아무렇지도 않았나요?” 이러니 1998년 2월 차가운 겨울날, 가뜩이나 외환위기에 얼어붙은 사회분위기에 너도나도 이 곡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ㅋㅋ
요즘 에우로파 갈란테의 《사계》를 아침저녁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홍천 비발디 파크라도 한 번 다녀와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
https://www.youtube.com/watch?v=SLP7c0o1Xq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