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괴물인가?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메리 셸리

by 하늘아래

누가 괴물인가?

창조주여, 제가 청했습니까, 흙으로 나를 인간으로 빚어달라고? 제가 애원했습니까, 어둠에서 끌어올려달라고?- 『실낙원』 중에서

메리 셸리(Mary Shelley,1797-1851)는 19세 되던 해인 1818년, 그녀의 첫 장편소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을 발표했다. 소설 창작의 배경은 메리 셸리의 남편인 퍼시 셸리가 쓴 서문에 잘 나와 있다. 이 시기 메리 셸리는 15세에 유부남인 퍼시를 만나 사랑에 빠져 유럽을 떠돌며 2년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1816년 여름을 제네바 근처에서 보냈다. 춥고 비가 많은 계절 탓에 우리는 저녁마다 불타는 모닥불 주변에 복작복작 모여 앉았고 어쩌다 수중에 들어오는 독일 유령 이야기들을 읽으며 즐거워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접할 때면 우리 마음속에는 모방하고 싶다는 장난기 섞인 욕망이 꿈틀거렸다. 또 다른 친구 둘과 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근거한 이야기를 각각 한편씩 쓰기로 했다. p.11

당시 스위스 제네바의 한 별장, 빌라 디오다티(Villa Diodati) 에 모였던 사람은 바이런(Lord Byron)과 그를 추종하던 주치의 존 폴리도리(John Polidori), 그리고 메리 셸리와 남편 퍼시 셸리였다. 바이런과 퍼시셸리는 당대 영국을 대표하던 지식층 낭만파 시인이었다. 폴리도리는 훗날 영국으로 돌아가 별장에서 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The Vampyre(뱀파이어),1819』라는 책으로 발간하였다.


'메리 셸리'라는 이름에 대하여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이 수집한 시체에서 조각조각을 꿰어 만든 피조물이었던 것처럼 메리는 자신의 이름을 여기저기서 가져와 붙였다. 결혼 전에는 페미니스트인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Mary Wollstonecraft)의 이름에 급진적 자유주의자였던 아버지 윌리엄 골드윈(William Godwin)의 이름을 붙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골드윈(Mary Wollstonecraft Godwin)이었고 결혼 후에 남편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를 붙여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셸리(Mary Wollstonecraft Shelley)’가 되었다.

19세기 영국은 아직 신분적, 성적 차별이 만연하던 시대였다. 다른 한편으론 교회를 통해 신의 말씀에 순종하던 중세적 인간을 벗어나 이성과 과학이 신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했던 시대이기도 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서구 유럽사회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였다. 밝음이 있으면 어두움도 상존하는 법, 신이 창조한 자연의 섭리가 근대적 가치와 충돌하면서 인간이 느끼는 존재의 불안이 엄습하였는데 자본에서 소외된 가난한 계층이 범람하고 범죄가 증가했으며 부유층의 도덕적 해이가 이어졌다. 19세기 괴담의 유행은 사회 변혁 과정에서의 불안감과 도덕성을 상실해 가는 인간에 대한 섬뜩한 공포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부유한 지식층들은 자유연애를 즐기고 영국을 벗어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고지식한 이야기들을 쏟아놓는 한담문화에 익숙했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을 길러내기 위한 계몽주의 교육에 맞물려 출판산업이 부흥하였고 서재를 만들어 마음껏 책을 읽고 자유분방하게 사고하는 독서문화가 탄생하였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을 읽다 보면 깜짝 놀라 웃음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닥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괴물이 당대에도 유명했던 『실낙원』, 『플루타르토스 영웅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 모습이다. 게다가 괴물은 책을 손에 쥐고 귀중한 보물을 얻었다고 한없이 기뻐한다. 우리가 알던 머리와 목에 나사못이 박히고 이마의 상처에 스테이플러를 찍고 나오는, 벙어리 키다리 프랑켄슈타인이 절대 아니다. 괴물조차 교양으로 책을 읽던 시대였다.

소설의 주인공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당연시하는 19세기 이성주의자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다. 그는 잉골슈타트 대학에 머물며 연금술과 화학, 생리학과 자연철학에 몰두하며 인간의 금기를 건드리고 만다.

특별히 내 관심을 끌었던 현상들 중 하나는 인간 신체, 아니 생명을 부여받은 모든 동물들의 신체구조였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대체 어디서 생명의 원리가 발생하는 것일까? 대담무쌍한 질문으로서, 이제까지 늘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로 간주되어 왔던 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탐문이 비겁함이나 부주의에 발목 잡히는 바람에 눈앞에서 탐구에 실패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p.63

그는 신의 은총과 가족의 축복 속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라 태어나는 일반적인 출산의 과정이 아닌 과학의 힘을 통해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 내었다. 신을 대신하는 창조주가 되려고 한 것이다. 그는 묘지와 납골소, 해부학실, 시체 안치소 등 음습한 곳에서 실험 재료들을 수집하여 인간과 동물의 뼈와 살을 하나의 몸으로 붙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었다. 괴물의 탄생이었다. 빅터는 모든 작업을 스스로 ‘더러운 창조’라고 하였다.

나는 시체안치소에서 유골을 수집했고 속된 손으로 인간 신체의 유장한 비밀을 어지럽혔다. 꼭대기 층에 있는 나만의 방에서, 아니 차라리 감옥의 독방이라 해야 할, 회랑과 층계로 다른 집들과 완벽히 분리된 곳에서 더러운 창조의 작업실을 운영했다. p.67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피조물은 신체의 비율을 무시한 기괴한 모습이었다. 2.5M의 키, 긴 흑발에 누런 피부, 새까만 입술. 육중한 몸의 그로테스크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다. 19세기 영국 백인 사회에 반하는 이질적인 타자였다.


괴물을 연기했던 배우들. 1931년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보리스 칼로프; 1994년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로버트 드니로; 2025년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제이콥 엘로


신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고 보기에 좋았더라고 말했다.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 먹었을 때도 죽이지 않았고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때조차 벗은 몸에 털옷을 입히기까지 했다. 신은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했다. 빅터는 그러지 않았다. 흉측스럽고 징그러운 피조물, 그는 이 피조물의 이름조차 지으려 하지 않았고 그저 ‘흉측한 것’, ‘괴물’이라 부르며 외면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신처럼 완벽한 존재를 만들고 싶었던 바람과는 달리, 괴물은 그의 타락한 도덕성과 욕망의 실현을 위해 추악하게 변한 내면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인간을 닮았으나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어두움이자 자기부정의 또 다른 자아였다. 또한 괴물의 탄생은 신에게 대역한 이성과 과학의 처참한 패배이기도 했다.

사람들 속에 내 손으로 풀어놓은 괴물은 이번 살인과 같이 소름 끼치는 일을 저지를 의지와 힘을 모두 갖고 있었다. 괴물은 바로 나 자신의 흡혈귀, 무덤에서 풀려나 내게 소중한 것들은 모두 파멸로 몰아넣은 나 자신의 생령(生靈)이었다. p.99

괴물은 인간의 언어를 습득하고 인간을 탐구하면서 인간 사회의 관계에 들어오기를 원했다. 빅터에게 원한 것은 자신을 닮은 반려자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괴물은 당시 사회가 지닌 모순적 모습과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을 표출하며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대상이 되어버렸다. 빅터는 자신의 창조물과 화해하지 않았다. 철저한 무관심과 증오만이 있었다. 괴물은 마침내 복수를 선택했다.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 무책임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빅터의 아들 윌리암을 죽이고, 빅터의 절친 앙리 클레르발을 죽이고, 최후에는 빅터의 연인 엘리자베트를 죽였다. 괴물은 자신을 창조한 빅터에게 경고했다.

노예여, 전에는 합리적으로 설득하려 했으나, 이제 보니 그렇게 사정을 봐줄 가치가 없는 인물이구나. 내게 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지금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네놈이 불행한 나머지 햇살마저 증오스러울 지경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네놈은 내 창조주지만 나는 네 주인이다. 순종하라! p.227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끝까지 자신이 ‘열정적인 광기로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만든 피조물을 인정하거나 잘못을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훨씬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이 만든 불행한 존재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극의 배 안에서 죽어가는 순간에도 후회는 없었다.

사랑하는 사자들의 혼령이 내 눈앞을 스쳐가니 어서 그 품으로 달려가야겠습니다. 안녕히, 윌턴! 평온함에 행복을 찾고 야심을 피하세요. 겉보기에 아무 죄가 없어 보여도, 과학과 발견에서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라면. 그런데 이런 말을 제가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나야 이런 희망을 품었다가 실패했지만 다른 사람은 성공할 수도 있는데. p.296

빅터의 이런 모습은 이성과 문명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예찬으로 보인다. 인간 사회에 대한 경고와 뼈저린 통찰은 모순적이게도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 괴물의 입을 통해 나온다. 괴물은 자신이 저주받은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 괴물은 닥터 프랑켄슈타인에게조차 연민을 느꼈으며 미천한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한 자신을 한탄한다. 괴물은 인간으로서 평범한 삶을 꿈꿨던 헛된 희망을 자조한다.

내가 미래에 악행의 도구가 될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 일은 거의 다 끝났으니까. 당신도 또 어떤 인간의 죽음도 내 존재를 완결 짓고 해야 할 일을 끝내는 데 필요치 않다. 그저 내 죽음이 요구될 뿐이다. 이런 희생을 내가 지체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말라. 나는 당신 배에서 내려 날 데려다준 얼음뗏목을 타고 지구의 최북단으로 떠날 것이다. 내 장례식을 위한 장작을 모아 화장용 더미를 쌓고 이 비참한 육신을 재가되도록 태워서, 행여 나 같은 존재를 하나 더 창조하고자 하는 호기심 많고 불경한 인물이 보더라도 남은 유골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게 하겠다. 나는 죽을 것이다. p.302

"Fear not that I shall be the instrument of future mischief. My work is nearly complete. Neither yours nor any man's death is needed to consummate the series of my being and accomplish that which must be done, but it requires my own. Do not think that I shall be slow to perform this sacrifice. I shall quit your vessel on the ice raft which brought me thither and shall seek the most northern extremity of the globe; I shall collect my funeral pile and consume to ashes this miserable frame, that its remains may afford no light to any curious and unhallowed wretch who would create such another as I have been. I shall die"




소설을 읽다 보면 인간이 합리적인 과학과 이성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며 오로지 호기심과 편의를 위해 자연을 도구로 이용한, 어긋난 결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모습이 단지 19세기에 존재했던 사람들만의 문제인지 되묻게 된다.


누가 괴물인가?


불완전함에 대해 용납하지 못하는 프랑켄슈타인보다 괴물에게 오히려 인간적인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왜일까? 괴물을 만든 것은 빅터였지만 괴물이 된 것은 빅터 자신이었다. 인과적 필연을 만들어 낸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과 다른 존재를 배척하며 거부함으로! 괴물이 혐오와 절망 속에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모두 닥터 프랑켄슈타인의 기괴한 오만, 실패와 그릇된 욕망, 그리고 선의를 악마화한 도덕적 가치상실에 원인이 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1818년 출간된 『프랑켄슈타인』의 원제목은 『프랑켄슈타인 또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 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였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선물한 대가로 신들에게 버림받아 카프카스의 바위산에 강력한 쇠사슬에 묶여 매일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영겁의 형벌을 받는다. 소설 속의 프랑켄슈타인은 그렇지 않았다. ‘현대의’라고 말한 것은 인간이 결코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존재가 될 수 없는 이기적인 존재임을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프랑켄슈타인, 메리셸리, 김선형 옮김 문학동네 2025



* 2025년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의 인터뷰 중에서(An Interview with Guillermo del Toro. by Lauren Wilford)

우리 삶 속의 진정한 괴물은 언제나 인간이다


I really am in love with the idea that the true monsters in our lives are human, always..I find the people in my life I find the scariest are the people that are most certain. You can be certain; of course you can—I am, a lot of the time in my work—but not all the time, you know? If you talk and don’t listen, you are a fucking monster, period. It’s truly scary to find someone that says, ‘This is the way it’s going to be.’ Because the beauty of the essence of life is variety; we are all different. There is all kinds of good. There is all kinds of bad. There is all kinds of evil. And there’s all kinds of benign. And if you don’t make an effort to understand that, I think it’s very scary.

저는 우리 삶 속의 진정한 괴물은 언제나 인간이라는 생각에 진심으로 매료됩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확신에 찬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물론 확신할 수 있죠. 저도 일할 때는 꽤 자주 확신을 하거든요.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잖아요. 말만 하고 듣지 않으면, 그냥 괴물이 되는 거죠. ‘이렇게 될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 무섭죠. 삶의 본질의 아름다움은 다양성에 있기 때문이죠. 우리는 모두 다르니까요. 온갖 종류의 좋은 것이 있고, 온갖 종류의 나쁜 것이 있어요. 온갖 종류의 악이 있고, 온갖 종류의 선이 있어요. 그리고 그걸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정말 무섭죠.


사진 제공: Netfl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