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게 멍든 시간들.35
짐을 한두번 싸본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가방에도 나의 생활을 전부 담을 수는 없었다. 커다란 배낭이나 과분한 덩치의 캐리어 같은 것들을 하나, 둘 채워 갈 때 마다 나의 삶은 생각보다 욕심이 많고 가진것도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들의 무게를 어깨위로 올려 보면서 ‘아, 어쩌면 나의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 깨닫기 위해 여행을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계기에 대한 사색에 잠기곤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행을 떠날 수록 더욱 선명해져가는 나의 취향은, 한국의 평범한 하루하루를 더욱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익숙한 세제로 세탁 된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와, 계절에 따라 매끈했다가도 부드러워지는 내 이불의 촉감과, 긴장하지 않고 걸어도 헷갈리지 않는 길, 늘 이어폰이 놓지 않는 음악을 들으며 하는 늦은 오후의 산책과, 좋아하는 카페의 좋아하는 자리, 언제든 날 반가워 맞이하는 친구들, 밥솥에 들어 있는 온갖 것을 넣은 우리 엄마의 잡곡밥, 늘 그대로 아는 곳에 있는 평범한 나의 일상들.
여행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이런 것들을 잊지 않고 그리워 하려고 여행을 하는 것 같다. 돌아와서는 또다시 그곳에 두고 온 여행을 그리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그리워 할 것이 있다는 것은 난 여기서 행복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기서 행복할/한 것. 저 문장을 한 단어로 줄여둔 것이 여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의 인생중 짧은 한 부분인 여행이라는 것은 나의 인생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
사랑과 여행의 공통점을 말해보자면 그 때에 내가 행복한 것. 두고온 시간들 속에서 행복했던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 그리고 끝나고 난뒤엔 허전하며, 아쉬움 속에서 더 나은 다음번을 기약하는 것. 그 속에서 안온함을 찾는 것 같다. 그리고 이건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 우리의 삶은 여행 아니면 사랑일지도 모른다. 물론 현재도 사랑한다.
영원히 여행해야겠다. 영원히 여행중인 삶이다. 많은 곳을 오래 여행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평범한 일상에 이르기 위해 나는 또 얼마나 많은 경유지를 거치며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그런 이야기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또 다시 그 경유지의 삶이 설렌다. 수 없이 반복한다 해도 다시, 다시 말이다. 그래, 나는 다시.
여행이 끝나면 어디로 가야할까. 그건 그 때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