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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늬 Jul 05. 2023

미지근하게 사는 게 뭐 어때서

이직일기 3

팀을 옮기고 벌써 1년 하고도 4개월이 지났다.

모든 업무를 완벽히 잘한다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웬만한 업무는 파악이 된 시점

조직 개편이 있었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팀에 동일한 연차의 실무자가 있었는데 승진 같지 않은 승진(?)을 했다. 부반장 같은 거라고나 할까

직급도 없는 회사에서 승진을 한다는 게 참 웃기고, 매니징을 할 정도의 능력도 연차도 안 되는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다는 게 화가 났다.

(세상이 원래 불공평하다지만 막상 그 일이 나한테 일어나면 매번 열이 받는다.)

그 사람은 직책을 달자마자 자기가 하기 싫은 온갖 짜치는 업무를 다 나에게 내려보내기 시작했고,

모든 업무 분배는 그 사람을 통해서 이뤄졌으며, 모든 업무 배경과 히스토리도 그 사람을 통해서 들어야 했다.

그러면서 맡은 과제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도 않으면서, 성과 나는 업무에 숟가락만 얹었다.


그런데 사실문제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나였다.

회사라는 곳은 원래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돌아가는 곳이 아닐뿐더러,

내가 미친 능력자도 아니니 온 지 1년 4개월 밖에 안된 나에게 부반장을 시킬 일도 없을 것이 당연했다.

그걸 알면서도 화가 났던 건 사실 그 사람 한 테가 아니라 나한테 서가 아니었을까


내가 미친 능력자였다면? 새 팀에서 일한 기간이 얼마든 내가 승진을 할 수 있었을 거고

그게 아니라면 웃으며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며 그들에게 아름다운 이별을 고할 수 있었을 텐데

결국 나는 엄청난 실력자도, 능수능란한 정치가도 아닌 그냥 일개 사원일 뿐이기에 이런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본인의 한계를 인정하는 게 제일 힘들다.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불만만 쌓였고 쌓이는 불만만큼 열심히 하고 싶은 의지도 사라졌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도대체 내가 쟤보다 뭐가 부족해서!라는 억하심정도 생겼다.


당연히 내가 TV에 나오는 능력자나 성공한 유명인들처럼 살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31년 인생 늘 평균 이상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런 내가 팀을 옮기고 나서는 그저 그런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미지근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이다.


스트레스 + 불안 + 화병이 겹쳐서 불면증에 시달리던 때

나영석의 나불나불 김종민 편을 봤다. 주제는 김종민의 미지근한 인생

잠이 안 와서 그냥 멍 때리면서 보려고 시작했는데 꽤나 인사이트가 있잖아?


슈퍼 스타는 아니지만 큰 구설수 없이 수년간 대한민국 사람 대다수가 아는 유명인으로 살아가는 그

연예인이 아닌 방송 자체를 직업으로 생각하고, 스타가 되고 싶은 욕심도 가진 적 없다는 그

무리해서 욕심내지 않지만 매사에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스타는 아니어도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롱런하는 연예인이 된 김종민


내가 미지근하다고 무시했던 인생이 이렇게나 빛나고 의미 있는 것이었다고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나는 오늘부터 미지근한 인생을 살겠어!


결심하자마자 인스타와 유튜브를 지웠다. 한국인의 불행 1순위의 원인 인스타와 유튜브 이제 다른 사람들의 만들어진 행복에 내 현실을 비교하지 않겠다!


두 번째로, 일이 꼭 재밌어야 하고 일을 꼭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모두가 일로 자아실현을 하는 것은 아니며 대다수의 사람이 덕업일치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성공한 사람들의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했다! 는 말을 듣고 ”성공 = 일을 잘한다 = 일이 재미있다 “의 프레임에 나를 가둔 것 때문이었다.


애초에 성공 = 직장에서의 성공을 의미하지 않을뿐더러 일이 재미있는 사람들에게도 회사 생활은  힘든 일이며, 일이 재미있다고 일이 언제나 잘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야 말로 프레임 속 숨겨진 진리다.

슈퍼스타가 되려 하지 않고 방송을 직업으로 택한 김종민처럼 나도 슈퍼스타 대신에 직업으로만 내 일을 대할 것이다.


세 번째로,오늘의 성적은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자고 많이 웃었느냐로 결정하기로 했다


나는 사실 선천적+후천적으로 어딜 가든 평균 이상은 해야 직성이 풀리고 누구에게 지는 것은 죽기보다 싫은 사람이기 때문에

사실 머리로는 회사가 뭐가 중요하냐 내 인생이 중요하지!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회사에서의 성과 내가 맡은 업무의 중요도 동료의 인정에 파도를 타듯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곤 했다. (이것도 참 쓰다보니 웃기네 뭐 별 대단하지도 않은 동료들이 인정해주는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랬을까..)

그래서 의식적으로 오늘 내가 회사에서 무슨 일을 했고 얼마나 잘했고 못했고 보다 오늘 내가 어떤 좋은 음식을 나에게 먹였고 얼마나 잘 잤으며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로 오늘의 성적을 매기려고 한다.


사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진짜 이걸 진심으로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부터 들긴한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다. 결과와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집착하는 내 모습이 오히려 지금까지 내가 해낼 수 있던 성취를 막은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 내가 누릴 수 있던 행복을 막은 것은 아니었을까?


성공하지 않으면 패배자가 되는 것 처럼 흑백논리를 가지고 몰아 부치는 미디어와 워워벨을 외치는 열정러들에게 묻고 싶다.


미지근하게 사는게 뭐 어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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