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식 학습 이론과 평균 이상병
올해도 어김없이 셀프 연말 정산을 해보려고 한다.
연말 정산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기억할 여유 조차 없이 흘러가 버린 나의 한 해를 정리하고 기록하기 위해서다. 어린 시절의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애를 태웠는데.
직장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매일 루틴한 업무와 짧은 주말을 반복하다 보면 한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일년이 흘러있기 마련이다. 작년에는 키워드를 꼽아서 각 키워드마다 내가 해낸 것들이 무엇인지 썼었다. 24년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보려다 24년은 23년만큼의 변화가 없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키워드를 뽑을 정도의 형체가 있는 성장은 없었던 것 같아서 다른 방식을 취해보려고 한다. 형체가 있지 않을 뿐 내적으로는 참 많이 성장한 한해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어느 정도의 혼돈의 시기를 거쳐 무엇인가 정리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2023년을 정리하고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나의 모습이 만족스러운가 라고 물어본다면
60% 정도 마음에 드는 것 같다. 100%는 아니다. 왜냐면 알다시피 나에겐 '완벽 주의' 기질이 있기 때문이다. 100%란 나에게 너무도 높고 도달하기 어려운 목표이기 때문에 60%정도도 매우 후한 점수다.
사실 23년은 나에게 힘든 한 해였다. 일도 많은 데다 쉽게 풀리지 않는 일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매일 내가 이 일을 잘해낼 수 있는 사람 인가를 의심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해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다 보니 소진되어 버린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는 뭔가를 열심히 하고 나면 그에 반하는 보상이 주어지거나 목표를 달성한다거나 했기 때문에 노력한 시간이 아깝거나, 허무한 감정을 느끼진 않았었는데, 직장 생활은 항상 내가 애쓴 만큼 늘 결과로 나오는 게 아니다 보니 허무함을 느끼고 방향을 잃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직장 생활을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거지만 노력이라는 요소보다는 정치의 요소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정말이지 핑계가 아니다, 회사가 커지고 조직이 커질수록 일을 책임감있게 잘 해내느냐 보다는 얼마나 눈에 띌만한 일을 자기의 일로 가져오고(가끔은 뺏기도) 관심이 집중되었을 때 얼마나 쇼잉을 잘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쇼잉도 실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목표가 오직 회사에서의 성공이라면 꼭 갖춰야 할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정말 유의미한 성과를 만들어내는 책임 없이 '쇼잉'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지만 꼭 필요한 일을 책임감 있고 완성도 있게 해내는 '쇼잉 피플'에 가려져 있는 동료들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회사 생활의 진리(?)를 깨닫고 나서부터는 사실 힘이 많이 빠지기도 했고, 허무한 감정을 많이 느끼면서 직장 생활에 경멸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던 생각은 '계단식 학습 이론'이다. 나는 '계단식 학습 이론의 신봉자인데, ‘계단식 학습 이론’이란 노력에 비례하여 학습 결과가 꾸준히 우상향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정체와 퇴보의 구간을 겪는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사실 삶에서 이루는 모든 성취의 과정 이 ‘계단식 학습 이론’을 따르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한 정체와 퇴보의 구간을 어떻게 견디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 아마도 23년의 나는 정체 구간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이 무엇이든 도약 구간에 다다르기 위한지난한 정체 구간을 지나고 있는 까닭에 이렇게 결과도 보상도 없는 노력을 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행히도 나는 정체 구간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내가 60%나 되는 후한 점수를 준 까닭도 그 이유다. 그런 내가 아주 기특하고 대단하다. 더 이상의 최선은 어려울 만큼 나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가 없다. 그렇기에 아마 다음에는 도약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한다.
마음에 드는 점을 이야기했으니 고치고 싶은 점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사실 나는 그게 무엇이든 평균 이상은 하고 싶어 하는 ‘평균 이상’병에 걸려 있다. 도대체 ‘평균 이상’이 어디쯤인지도 모르면서 늘 사회에서 평가하는 ‘평균 이상’의 사람이 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하면서 살았다. 23년에도 ‘평균 이상’병이 몇 번 급성으로 발병한 적이 있었다. 다행인 것은 '평균 이상'병이 발병할때마다 옆에 있어주는 가족들이 있다는 것이다. '평균 이상'병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나에게 가족들은 늘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나의 소중한 반려견 동오도 '평균 이상'병 극복에 큰 도움이 된다. 나에게 바라는 것은 간식과 관심 그리고 사랑 뿐인 동오와 함께하면 내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남의 시선보다는 나의 마음에, 의무보다는 즐거움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 보려고 한다. 뭘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지금의 내 모습은 평균 이상을 넘어 완벽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히 스쳐지나간 영상에서 발견한 문구를 마음에 새긴다.
"실현되지 않은 계획에, 이루지 못한 목표에, 실패한 관계에 절망하지 말 것, 실패하는 실험을 즐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