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강아지 밤이를 보내고

종과 종의 돌봄관계를 다시 생각하기.

by 밤이언니

불안했던 20대와 갈망하기 바빴던 30대 초반을 그래도 사람답게 살게끔 만들어준 밤이를 보냈다. 10년을 꼬박 함께 했던 사랑하는 내 작은 강아지 밤이를 보냈다.


밤이를 보낸 후 슬픔과 죄책감을 느끼며, 추억하는 사진을 보고 때때로 눈물을 흘리거나, 귀엽다며 웃기도 했다. 하루는 공허한 마음을 견디는 것이 이토록 힘들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내 삶은 밤이를 보낸 것 이외에 달라진 것이 없고, 오히려 더 나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배하는 감정은 공허함이었다.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싶었다. 밤이가 사라진 이후에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타인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참 어렵다. 나를 돌보는 수많은 일들 중 하나인 마음 들여다보기는 뭔가 끈덕지게 이어지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스스로 질문을 잘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을 끝까지 묻거나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건 성격이 급한 탓일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차이를 명확히 알아서인가?


계속되는 고민 중 남편이 저녁 산책을 제안했다. 비가 내린 뒤라 공기가 맑았다. 비내리는 날 창문을 조금 열어두면, 창틀에 앞발을 올리고 열심히 코를 움직이던 밤이가 있었는데. 한참 산책을 하다가, 밤이에 대한 죄책감을 덜고자 내가 먼저 입을 땠다. '밤이 보낸 날, 내가 출근하고 밤이 계속 안좋았지?' 남편은 나에게 밤이 상태가 좋지 않았고, 우리가 결정한 안락사가 어쩔 수 없었음을 다시 한번 말해줬다. 그렇게 서로를 안심 시키는 대화를 이어가던 중 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남편과 나는 밤이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일상에서 밤이 없는 일상으로 이행하며 '적응'하는 중이다. 우리는 대때로 그렇지 않았지만, 10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밤이를 중심으로 지내왔다. 주말을 밤이와 함께 보내는 것은 당연했고, 외출도 밤이가 함께 갈 수 있는 곳만 골라서 가거나 아니면 따로 했다. 외식은 꿈도 꾸지 못했고 우리에게 만남을 요청하는 가족과 지인을 집으로 불렀다. 이렇게 밤이와 함께 하는 동안 불편한 것도 있었지만, 밤이와 함께 하는 그 자체의 행복이 매우 컸다. 밤이가 없는 지금은 외식과 외출을 자유롭게 하지만, 행복감은 자유롭지 못한 그때만 못하다. 어떤 기쁜 일이 있어도, 밤이와 함께 하던 그 기쁜 때만 못하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우리가 밤이를 돌본 것인가, 밤이가 우리를 돌본 것인가. 돌봄이라는 것은 결국 관계 속 상호작용이라는 것. 이제껏 우리가 밤이를 돌봤지만, 결국 우리는 밤이에게 돌봄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밤이가 없는 지금 우리는 돌보지도 돌봐지지도 않게 되었다.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기 어려워졌다. 밤이가 없으니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일이 사라진 것 같다. 마치 자식을 다 키워낸 부부가 어찌할바를 모르는 생활을 맞이하는 기분과도 같은 것 같다. 견디고 적응해야 한다. 이제는 각자가 자신을 그리고 서로를 돌봐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또 다른 관계로 이어져 살아갈 수 있다.


밤이의 빈자리에 또 다른 돌봄의 존재를 세우고 싶지 않다. 그러지 않고, 온전한 관계와 삶으로 나아가고 싶다. 남편은 밤이가 아픈 동안 직접 돌봄에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쏟았다. 밤이에 대한 상실감은 나보다도, 남편이 더 심하게 느낄 것이다. 밤이를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았기 때문에 밤이로부터 많은 돌봄을 받았을 것이다. 밤이가 떠난 직후, 남편이 말했다. 밤이를 핑계로 자신이 해야할 많은 일들을 미루고 있었다고. 어쩌면 남편에게 밤이는 자신이 쉬어갈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남편은 그렇게 밤이로부터 보호받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밤이가 떠난 후 모든 일이 재미없게 느껴진다. 큰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밤이가 떠나기 전 나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매달려온 박사 과정을 끝내고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일년 내내 진행하던 연구프로젝트를 끝냈고, 교수로 임용이 되었다. 밤이를 보낸 후에는 내가 하는 일이 더 잘되고 더 많은 돈을 벌어도 기쁘지 않았다. 밤이가 있을 때는 프로젝트로 적은 돈을 벌어도 기뻤고 그 돈을 곧장 밤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사기 바빴다.


남편과 나는 밤이를 돌보는 주체로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표현했고 그 덕에 각자 존재의 당위성을 확보했다. 마치, 돌보는 사람의 모습은 이렇다! 그리고 이토록 대단한 일을 내가 하고 있다!라는 표현을 끝없이 해댔다. 이건 돌보는 자의 오만이었다. 돌보고 있음을 서로 주장하는 동안 밤이로부터 행해지는 돌봄은 생각치도 못했다. 우리는 돌봄을 하면서 동시에 돌봄을 받고 있었다. 밤이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돌봄을 받고 있었다. 어리석은 두 인간은 개에게 돌봄을 받고 있었다.


밤이가 없는 지금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더이상 설명하지 않는다. 밤이가 없는 지금 우리는 돌봄으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있다. 돌봄이 먼저인지, 관계가 먼저인지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돌봄 없는 관계에 적응이 안된다는 것이다. 밤이라는 존재의 상실은 돌봄을 행하는 사람의 존재 방식과 붕괴로 이어진 것 같다. 남편과 나는 돌봄을 행하던 자로서의 존재를 잃었다.


남편과 나,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재정립이 필요하다. 밤이와 그 관계의 상실을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 돌봄이 부재한 상황에서 밤이의 존재를 또 다른 돌봄으로 채우지 않고 각자의 자기 돌봄을 통한 관계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밤이는 내 곁에 없지만, 나는 밤이에게 끝없이 돌봐지고 있음을 느낀다. 사랑하는 내 강아지 밤이. 언니 오빠의 영원한 가족 밤이. 없지만 있다는, 이토록 추상적인 말이 이렇게 구체적인 힘이 될거라 생각도 못했다. 밤아, 내가 살아낼 수 있게 돌봐줘서 고마웠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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