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잘 넘어졌다. 넘어질 때마다 무릎이 까였고, 새살이 나기 전 딱지가 앉으면 그걸 벗겨내는 이상한 재미를 느꼈다. 딱지를 벗길 때마다 피가 났다. 그때는 그 피가 아까운거라 생각도 못했다.
2019년쯤 나는 하얀 침대에 누워 누군가의 피를 내 몸 속에 넣고 있었다. 어떤 날에는 피가 줄어들어 손가락 마디 마디에 힘이 들어가지 않기도 했고, 또 다른 날에는 주변 지인들에게 헌혈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어릴 때 딱지 벗길 때마다 봤던 피. 그 피가 그렇게 생각났다.
병원에서 내 하루는 체혈, 그러니까 피 뽑기로 시작되었다. 피를 뽑고 2시간 정도 지나면 간호사가 성적표를 가져온다. 중고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나눠주던 문어발 성적표와 똑같이 생겼다. 이른바 병원의 문어발이랄까? 병원에서 받은 문어발에는 헤모글로빈, 백혈구, 호중구, 혈소판 수치가 적혀있다. 그래, 헤모글로빈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백혈구는 뭐고, 호중구는 또 뭐야. 아 혈소판은? 도대체 너네 뭐하는 애들이니.
항암 주사를 맞고 나면 백혈구 수치가 바닥까지 내려간다. 어떤 날은 내 몸에 백혈구 수치가 0이다. 백혈구가 0이라는 것은 내 몸을 보호하는 면역기능이 거의 없다는 의미다. 이때는 그야말로 몸을 사려야한다. 여기에 빈혈 증상이 심하면 넘어지면 안되니까 누워있으라는 지시를 받기도 한다. 그런데 백혈구가 0일 때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은 미각 상실이었다. 맛에 죽고 맛에 살던 나에게 미각 상실은 아주 큰 스트레스였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항암 약이 내 몸에 들어온 이후 내 혈액 수치가 떨어지는 순간부터 나는 모든 음식을 일체 익혀먹어야 했다. 처음에는 쉽다 생각했지만, 푹 쪄서 내 앞에 놓여진 김치와 야채들을 볼 때면 마음이 답답했다. 항암 기간이 끝나고 설렁탕이 먹고 싶어 남편에게 사와달라 부탁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렸고, 설렁탕이 도착했다. 그런데 내 시나리오에는 깍두기 없는 설렁탕은 없었다. 쌀밥과 설렁탕 국물이 어우러져 에서 끝났다. 그 위에 올라가야 하는 깍두기는 익힌 음식이 아니기 때문에 먹지 못했다. 그날은 눈물이 났다. 내가 언제 깍두기를 못먹어서 울고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남편은 자기도 함께 깍두기를 먹지 않겠노라며 의리를 지키려 했다. 하지만 그냥 먹으라고 권하고, 나는 계속 울었다.
생리를 하거나 몸에 상처가 나지 않는 이상 피를 보는 일은 드물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소 만큼이나 당연하게 느껴지던 게 피 였던 것 같다. 뭐, 내 몸 안에서 잘 돌고 있겠지 싶은게 피다. 특별히 눈에 보이지도 않고 연중행사 같은 건강검진을 가도 모두들 피 수치는 크게 이상이 없다. 그런데 몸에 피가 모자라면 일상생활에 크고 작은 문제가 하나씩 생긴다. 그러니까 몸이 계속해서 신호를 보낸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먼저 생리를 한 달 내내 했었다. 보통 생리를 하면 일주일 조금 넘게 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한 달 내내 생리를 했다. 그러면서 항상 어지러웠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경험도 했다. 또 다리 한쪽이 저려서 걷기가 어렵기도 했고, 미각이 조금씩 사라지기도 했다. 주변 사람들은 전형적인 운동부족이라고 진단을 내렸지만, 병원에서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이라 했다.
급성골수성백혈병. 네? 제가요? 정확한 원인은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렇게 큰 일에 원인이 없다는 전문가 의견에 말 문이 막혔다. 오진이 아닐까. 이게 내 검사결과가 아니라 다른 사람 것과 바뀐게 아닐까. 온갖 상상이 시작되었다.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에 친구의 소개로 부산의 한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대학병원으로 가는 길. 설마 아닐거야. 아니겠지 하면서도 뭔가 큰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앞에 병원에서 검사한 진료기록지를 보여줬다. 대학병원 의사는 급성골수성백혈병을 99% 확신한다 했고, 곧바로 골수검사를 하자고 했다. 골수검사가 뭔지는 모르지만 일단 알겠다 하고, 인터넷에 검색을 했다. 골수검사는 환자가 엎드린 상태에서 골수가 생성되는 엉덩이 아래 뼈를 주사바늘로... 엉덩이... 뼈? 뼈?
진단을 받고 5년이 흘렀다. 올해 12월 20일이면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산정특례가 끝난다. 조혈모세포 이식을 받은 지는 3년이 지났다.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일상생활 중에도 병원에서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병원에 있을 때는 틈만 나면 밖으로 나오고 싶어했다(어떤 때는 주치의에게 울면서 내보내달라고 애원하기도...).
물론, 나는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도 일상생활의 연속이라 생각한다. 병원에 있을 때 항상 자기 전에는 눈물이 꼭 났다. 낮에는 같은 병실을 쓰는 사람들의 말 소리와 의료진의 분주함 덕분에 내 나름의 일상을 보내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밤에는 창밖의 불빛, 그러니까 지나가는 자동차나 건물에서 새어나오는 빛들이 병원 안과 밖을 구분짓는 선 처럼 느껴졌다. 어두운 이곳에서 언제쯤 저 빛 사이로 나갈 수 있을까 생각하면 눈물이 났다.
이제 한달이 지나면 암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산정특례가 종료된다. 주치의도 내가 나아졌다 판단하는지 산정특례 연장은 필요없다고 했다. 지금도 병실에서 창 밖을 보며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인간은 살아가며 아플 수밖에 없고, 또 아픈게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프면 무언가를 원망하게 된다. 그 원망은 타인에게 부여되기도 하지만, 결국 끝에는 자기자신에게 돌아가기 쉽다. 아픈 사람은 아픈 걸 이겨내는 그 과정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원망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순간 순간을 넘기는 것, 그것으로도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산정특례 종료와 함께 내 병력에 얽힌 이야기들을 그냥 흘려보내기가 아쉬워 글을 써 본다. 내가 수많은 날 동안 포털 검색 창에 '급성골수성백혈병', '급성골수성백혈병 투병기'를 꾸준히 검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써둔 글에 울고 웃으며 나도 할 수 있다고, 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 글이 누군가에게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계속해서 써 내려갈 예정이다.
그리고 나도 당신과 같이 아팠다고, 하지만 지금까지도 잘 살아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 글을 보고, 다음 글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남깁니다.
급성골수성백혈병 투병기는 매주 토요일 밤마다 작성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