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의 역사 그 첫 번째 이야기
2004년, 우리 집 역사의 시작은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20만 원 남짓한 월세집에서부터였다.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곳은 방이 두 개였지만, 작은방은 우리 부부가 함께 누우면 꼼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비좁았다. 그래도 공간의 크기가 우리 부부의 꿈을 가둘 수는 없었다. 가진 것 없는 지방출신 젊은 부부는 서울 강남 3구 자가 아파트에서 아이를 키우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즐거운 상상 이면에 현실은 매캐했다. 아내가 튀김을 해주겠다며 냄비 뚜껑을 닫고 기름을 끓이다 불을 낼 뻔했던 아찔한 기억,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그 집에 터를 잡고 살던 쥐 두세 마리를 잡아야 했던 서글픈 사투. 쥐를 잡던 날, 아내는 결심한 듯 말했다.
"이사 가자." 그렇게 우리는 첫 번째 집을 떠났다.
대학원 시절, 우리는 2년에 한 번꼴로 짐을 쌌다. 연남동 반지하에서 가양동 아파트로, 다시 연희동으로. 가양동 시절 9호선 개통 호재로 치솟은 전셋값은 가난한 대학원생 부부를 다시 밖으로 밀어냈다.
연희동으로 이사하던 날을 기억한다. 세상이 온통 새하얀 함박눈으로 뒤덮인 날이었다. 이삿짐을 나르는 일은 고역이었지만, 지금 내 기억 속 그날은 눈이 내리는 풍경의 아름다움으로만 채색되어 있다. 연희동 집은 고가도로 아래, 철길이 지나는 곳이었다.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땅이 울렸다. 우리는 매일 미세한 지진을 겪으며 살았다. 그 진동 탓에 바닥은 평평하지 않았고 곳곳이 갈라지고 움푹 패어 있었다. 그래도 그 집은 넓었다. 방 두 개에 거실과 주방이 분리된 번듯한 구조. 월세 40만 원에 누릴 수 있는, 흔들리지만 넓은 평화였다.
그 무렵 내 삶도 조금씩 궤도를 찾아가고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도곡동에 상담실을 열었고, 법인 설립을 준비했다. 아내 역시 여의도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공인중개사 시험이었다. 2달 남짓 시험을 준비했던 첫해는 보기 좋게 낙방했지만, 이듬해 아내는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흔들리는 집을 피해 집 앞 고시원에 틀어박혀 공부하더니 멋지게 합격증을 따냈다.
잠실의 부동산에 취직한 아내는 두 달 만에 "적성에 안 맞는다"며 그만두더니, 이번엔 경매학원으로 향했다. 주말마다 수도권을 돌며 임장을 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니던 시절. 아내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안양 범계역 근처 빌라를 경매로 낙찰받고 내게 말했다.
"오빠 나이 50이 되면, 내가 작은 건물 하나 사줄게."
그때 아내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첫 내 집을 마련했을 때, 아내의 으스댐과 며느리를 자랑스러워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선하다. 나는 그 들뜬 분위기에 온전히 섞이지 못한 채, 그저 아내를 칭찬하고 어머니 맞장구를 쳐드렸다. 첫 경매에 성공한 아내의 목표는 확고했다. '강남 3구 입성'. 그 목표를 위해서 첫 집을 팔았다. 그리고 송파구 아파트형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그녀는 그때부터 차를 몰고 강남 3구 경매 물건을 보러 다녔다.
하지만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에겐 더 크고 무거운, 하지만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변수가 찾아왔다. 결혼 14년 만에 병원의 힘을 빌려 첫 아이를 가졌다. 안양 집을 팔고 송파구 오피스텔 월세로 옮겨 강남 3구 자가의 삶을 노리던 아내의 계획은 이때부터 기분 좋게 틀어지기 시작했다. 노산에 첫 아이라서 줄곧 누워 지내던 그 시간 그리고 태어난 아이를 키우며 행복해하던 그 시간에 주택 가격은 미친 듯이 폭등했고, 안양 집을 판 돈은 야금야금 줄어들었다.
그리고 집을 고르는 제1조 건이 '투자가치'에서 '양육 환경'으로 바뀌었다. 판교로 출퇴근하던 시절, 우리는 동탄2신도시로 향했다. 평화롭고 안전한 공원, 아이 키우기 좋은 인프라. 동탄은 참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 평화가 사람을 안심시켰던 걸까. 늙은 부모임에도 우리는 둘째를 갖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웬걸, 한 명이 아니었다. 송파 마리아병원에서 "쌍둥이입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그 복잡 미묘한 양가감정, 그리고 동탄의 산부인과에서 "남매 쌍둥이입니다"라고 확진받던 순간의 전율. 그날 이후 강남 입성을 꿈꾸던 '투자자 아내'는 사라지고, 맹렬한 '다둥이 엄마'가 등장했다. 1호는 외교관, 2호는 법관, 3호는 의사를 시작으로 국가대표, 아이돌, 교수 등 등 강남 3구 자가를 외치던 그녀가 달라졌다.
예기치 않게 다자녀가 된(그 당시는 3명이 다자녀였다) 우리에게 '다자녀 특별공급'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생겼다. 그리고 3기 신도시 사전청약이 눈앞에 있었다. 하남 교산을 꿈꿨지만, 집을 소유했던 이력 탓에 점수가 모자랐다. 차선책은 남양주였다. '정약용의 도시'라는 선비의 기풍이 느껴지는 긍정적인 선입견 덕분인지 망설임은 없었다.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 우리는 화도읍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쌍둥이를 낳았다.
왕숙2지구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마침내 왕숙1지구 B17 블록 사전청약에 당첨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다산신도시에 머물며 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 본청약 신청을 마쳤다. 12월 23일이면 우리가 살게 될 동과 호수가 정해진다.
300만 원짜리 월세방에서 시작해 쥐를 잡고, 흔들리는 바닥을 견디며, 건물을 사주겠다던 호기를 지나, 이제는 세 아이의 아빠가 되어 내 집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 다자녀였기에 가능했던 당첨. 이 운명 같은 집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갈지, 그 설레는 계획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2편에서 계속)
3기 신도시 이야기, 경매에 탈락했던 경험, 실수로 놓쳤던 동대문구 아파트 경매 우리 집의 역사가 2편에도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