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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욕구는 짧고 삶은 길다

금연 113일 보고서 2편

by 담연 이주원

https://brunch.co.kr/@tnlfl20/181

위는 금연보고서 1편


금연을 시작한 첫날, 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대단한 결심도 아니었고, 보여주고 싶은 각오로 시작한 금연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금연 선언을 알리지 않은 건 예전에 “나 금연한다”라고 선언했다가 실패했을 때의 그 뻘쭘함, 그 민망함이 싫었다.


그래서 이번엔 정말 조용히 시작했다.

나 혼자만 알고, 나 혼자만 겪고,

나 혼자만 넘어가는 방식으로.


이게 내게는 꽤 큰 도움이 됐다.

누가 지켜보지 않으니 부담도 없고,

실패해도 나만 아는 일이고,

성공해도 나만 아는 일.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뒤 서프라이즈 이벤트가 될 거라는 기대(이건 나만의 착각이었음)

나에게 금연은 혼자 시작하는 게 더 수월했다.


한 달쯤 됐을 때, 그제야 아내에게 말을 꺼냈다.


“나… 금연 중이야.”


아내는 반찬을 놓다가 고개도 안 들고 대답했다.


“응? 아… 그래?”


그 담담한 반응이 이상하게 웃기면서,

한편으론 현실적이었다.


정말 그렇다.

금연한다고 해서 가족들이 북을 치며 축하할 일은 아니다.

그저 일상의 작은 이벤트일 뿐이다.


다온이도 내 금연 소식을 듣자마자

“오~” 하고 웃더니 바로 자기 할 일을 한다.

한준이는 관심 없고,

채린이는 더 관심 없다.


금연은 결국,

나 스스로 기뻐할 일이다 건강도 시간도 좋아졌으니. ”


그 이후로 가족이 바뀐 건 딱 하나였다.

아내에게서 “담배 냄새난다”는 말이 사라졌다는 것.

이건 아주 작지만 은근한 보상이다.


타인에게 금연을 말하는 건

동료나 친구가 “담배 피우러 가시죠?”라고 했을 때였다.


나는 생각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아, 저 끊었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아, 나 정말 금연했네’라는 실감이 밀려왔다.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내가 내 귀로 그 말을 듣는 게 더 컸던 순간이었다.


이후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형이요? 와…”

“어떻게 끊으셨어요? 방법 좀 주세요.”

“전자담배로 바꾸면 되는데 왜 끊어요?”

“대단하다. 나도 해야 하는데…”


제각각 반응들이 은근히 금연 지속에 도움이 됐다.

좋든 나쁘든

내 선택을 밖으로 확인하는 일이었으니까.


금연 113일 동안

내 생활에서 가장 먼저 달라진 건 욕구를 버티는 방식이었다.


흡연 욕구는 강하다.

하지만 놀랄 정도로 짧다.


폭풍처럼 확 올라왔다가

20~30초면 사라진다. 흡연욕구와 멱살 잡고 싸우지 않는다면 그냥 그렇구나 흘러보내며 하던 일을 하거나 주의전환을 하면

길어도 1분을 넘기지 않는다.


나는 이 사실을 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넘기기 위한 방법을 만들었다.


물 한 잔 마시기

알림 울린 sns, 메일 하나 답장

이어폰 꽂고 음악 들으며 일하기

세면대에서 얼굴에 찬물 한번

집 안 어질러진 거 하나 바로잡기

아이들 사진 보기

초콜릿이나 사탕 하나 깨물기


이건 거창한 기술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통한다.

왜냐하면 금연은 ‘의지 싸움’이 아니라

방향 전환 싸움이기 때문이다.


욕구와 정면으로 싸우면 지고,

주의를 옮기면 이긴다.

그게 금연 기술의 핵심이라는 걸

113일 동안 아주 자연스럽게 배웠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내 마음속에 생긴 문장이 하나 있다.


“나는 금연자다.”


금연 첫날부터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

성공하고 나서가 아니라

성공하기 전에 말했다.


나중에야 깨달은 건데

이 문장이 내 행동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흡연 욕구가 올라올 때마다

그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이미 끊어낸 사람이다.”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어떻게 부르는가에 따라

다음 행동이 따라간다.


나는 금연을 통해 그 사실을 제대로 느꼈다.


생활 리듬도 완전히 달라졌다.

담배를 피울 때는

하루가 한 시간 단위로 분절되어 있었다.


일하다 한 대,

회의 끝나고 한 대,

점심 먹고 한 대,

집에 오기 전에 한 대.


시간은 늘 담배로 나눠져 있었다.


금연하고 나니

그 ‘중간중간’이 사라졌다.

일이 한 줄기로 이어지고

몰입이 훨씬 길어졌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아… 담배가 휴식이 아니었구나.”


휴식처럼 위장한

작은 시간 파편들이었을 뿐이었다.


건강검진 결과는 보너스였다.


금연 100일쯤 검진을 했는데

결과지를 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LDL 콜레스테롤 내려감

중성지방 내려감

혈압 이전보다 낮아짐

간 수치 안정


그동안 고지혈증 수치 때문에 걱정했는데

금연 하나로 변화가 나타났다.


의사가 말했다.


“요즘 뭐 하세요? 살도 빠지시고 수치도 이전보다 좋아요.”


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담배 끊었습니다.”


몸은 정직하다.

그리고

몸은 내가 하는 결심을 제일 먼저 알아챈다.


감정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반사적으로 담배를 찾았다.

담배로 감정을 눌러버리면

그 감정이 다른 방식으로 튀어나왔다.


금연하고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감정이 잔잔해지는 경험이 생겼다.


짜증 나도 그냥 짜증 나고

답답해도 그냥 답답했다.


담배로 덮어두지 않으니

감정이 자연스럽게 흐르고

잠깐 있다가 사라졌다.


감정의 진폭이 줄었다.


그저

‘감정이 지나가는 걸 가만히 두는 법’을 배운 것이다.


생활의 선택도 바뀌었다.


금연 초기에

유혹이 될 만한 환경을 피했다.


술자리

갈등이 생길 만한 대화

짜증 나는 뉴스

심야 공복감에 야식

혼자 있는 공허한 시간

포만감 넘치는 식사(이 행동으로 살 빠짐 이제는 다시 찌는 중 포만감 있는 식사에도 담배 생각이 안 나요)


경험은,

“금연은 담배만 끊는 게 아니라

쓸데없는 싸움을 줄이는 일이기도 하구나.”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마지막 변화는

삼남매와의 거리였다.


담배를 피우던 시절에는

아이들에게 가까이 가기 전

옷 냄새를 걱정했고

손도 씻어야 했고

양치까지 해야 했다.


지금은 그런 고민이 없다.

그냥 안으면 된다.

그냥 같이 누우면 된다.


한준이의 손을 잡고 뛰어갈 때,

채린이가 내 목에 얼굴을 묻을 때,

다온이가 팔짱을 끼고 걸을 때


나는 느꼈다.


“금연의 가장 큰 보상은 사람과의 거리다.”


특히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사람들과의 거리.


금연 113일.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지

언젠가 다시 피울지

솔직히 나도 모른다.


금연은 성공·실패로만 나눌 수 없는

인간적인 여정이니까.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나는 지금의 나를 좋아한다.


건강하고,

가볍고,

평온하고,

가까워진 아빠.


금연은 나를 완전히 바꾼 게 아니라

원래의 나로 조금씩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이 기록이

금연을 고민하는 누군가에게

작은 실마리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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