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자신을 자기 주도적인 사람이라 믿어왔다. 어떤 선택이든 어떤 행동이든 내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고, 그 믿음에는 의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확신이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어느 날 문득 내가 분명히 스스로 결정한 일인데도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 결정엔 어딘가 타인의 시선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보일까, 괜찮아 보일까, 멋있어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판단은 어느새 내가 진짜 원하는 것보다 타인이 기대할 법한 모습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즈음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지금 나는 진정으로 ‘나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듯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되돌아보면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런 삶을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삶이 나를 위한 것이기보다는 남들에게 보여지기 위한 무언가처럼 느껴졌던 순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기타를 샀던 일이 생각난다. 기타 치는 사람은 왠지 멋져 보였고 나도 그런 분위기를 가질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준비도 계획도 없었지만 그냥 그날 따라 마음이 확 쏠려서 20만 원짜리 기타를 덜컥 사버렸다. 음악 듣는 걸 좋아했고, 노래하는 것도 즐겼기에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내 모습을 자연스레 떠올렸다. 영상으로 찍어 공유하면 꽤 멋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금세 나를 꺾었다.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 때문에 줄도 제대로 못 튕겼고 코드도 좀처럼 손에 익지 않았다. 며칠 연습하다가 포기했고 다시 도전해봤지만 F코드에서 또 멈췄다. 그러다 줄이 끊어지고 나서는 아예 기타를 꺼내지도 않았다. 지금도 방 한쪽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놓여 있다.
그런 실패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큼 관대했다. 나와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너무도 쉽게 정리해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간단히 넘길 수 없는 공간도 있다. 예를 들어 회사는 실패한 걸 덮어두고 지나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출근해야 하고 정해진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하며 그 책임은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다가온다. 여기는 내 생계의 기반이고 어쩌면 앞으로 수십 년을 함께해야 할지도 모르는 곳이다. 이곳에서의 실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종종 나라는 사람 전체를 평가받는 일처럼 느껴진다.
특히 내가 알고 있었던 일이었음에도 실수가 생겼을 때 자책은 훨씬 더 깊어진다. ‘이건 분명 할 수 있었던 일이었는데 왜 그랬을까.’ 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다.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속에서는 계속 불안이 밀려든다. 퇴근한 후에도 심지어 주말에도 머릿속은 그 실수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도 마음속 불편함은 며칠이고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회사 밖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화 중 무심코 던진 말이 혹시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면 그날 하루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반년 전쯤 종종 같이 운동하던 지인의 결혼식에 빠졌던 일도 그렇다. 청첩장 모임에 초대를 받았지만 선약이 있어서 못 간다고 말했고 모바일 청첩장도 받았지만 결국 잊어버렸다. 그날도 평소처럼 운동한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다가 지인의 결혼식 사진이 다른 지인의 게시물에 올라온 걸 보고서야 실수를 깨달았다. 그 뒤로 연락을 하지 못했고 우연히 마주쳐도 인사만 건넬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그 사람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직도 그 일이 마음에 걸린다.
이런 성향은 아마도 오래전부터 형성되었을 것이다. 나는 집안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손녀이자 장녀였다. 띠동갑 사촌들보다 훨씬 앞서 어른들의 관심을 오롯이 받으며 자랐다. 조용하고 말을 잘 들었으며 문제를 일으키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혼날 일도 없었고 별 노력 없이도 칭찬이 따라왔다. 누구에게도 특별히 미움받은 기억이 없었기에 나는 점점 ‘괜찮은 아이’로 여겨졌고 그 기대에 부응하려 애를 쓰게 되었다. 실망을 안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실수가 있어도 들키지 않으려 감췄다. 미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에 미움을 감당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늘 완벽하고 무난한 사람이어야 했다.
결국 지금의 나는 애써 바라던 그 무던한 사람으로 자란 셈이다. 나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고 누군가에게 실망을 주는 일은 피하고 싶다. 동시에 나답게 살고 싶다는 바람도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 두 마음은 자주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어쩌면 누구나 품고 사는 당연한 모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바란다. 지금 내가 내리는 선택들이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기 위한 연기가 아니라 정말 내가 원해서 택한 길이었기를. 최근 나는 아주 사소한 것부터 다시 묻기 시작했다. 이걸 하고 싶은 이유가 ‘누군가에게 괜찮아 보이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원해서’인지. 그 질문 하나가 선택을 덜 복잡하게 만들고 그 선택이 나를 덜 흔들리게 한다. 그게 나를 납득시키는 가장 단단한 근거가 될 수도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