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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신 Nov 11. 2023

빈 작업실에 붙이는 각주

뮤지엄헤드《더비 매치: 감시자와 스파이》김원진 작가

*  각주는 공간상에 위치하므로 언제든 순서를 바꿀 수 있다. 


1  작가는 다른 나라에 있다. 그와 영상통화를 하며 쓴 노트에는 어떤 경위였는지 모르지만 “기억도 피부 없이는 안 된다.”는 문장이 남겨져 있다. 그가 부재한 틈을 타 작업실에 방문하기로 한다. 열린 빈 곳에 남아 있는 그들이 무성하다. 


2  나는 그를 알게 되었으나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로 한다. 노트와 비평에 자주 등장하는 ‘기억’과 ‘시간’이라는 단어도 적지 않기로 한다. 통화에서 그는 우리가 기승전결이라는 학습된 구조로 소통한다고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렇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 


3  들여다보아야 하는 미시적 세계. 만진다면 미묘한 두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4  각주에 대한 각주. 여기서 각주는 나뭇가지처럼 자란다. 


5  종이는 오랜 과정을 거쳐 작업실에 왔다. 무엇도 없이 미색인 종이는 원재료인 나무를 떠올리게 한다. 맨 종이는 실의 짜임도 아니고, 하얀 물감이 매끄럽게 발린 물건도 아니다. 닥섬유는 흐르는 물에서–고여 있는 물에서–오랫동안 있다가–발로 떠내어져– 너르고 뜨끈한 철판 위에서–수분을 날렸다. 그리고 한쪽은 매끈한, 다른 쪽은 보풀이 간간이 보이는 종이가 되었다. 한편, 다른 종이는 물에 담긴 나무 조각들이–삶아지고 으깨어져–철망 위에 얹힌 뒤–다려지고–둥글게 말려 롤지가 된 다음–규격화된 낱장으로 잘려 여기에 왔다. 


6  작업실 한구석에는 색색깔의 연필과 크레파스가 있다. 종이에 스미지 않는, 건조하고 뭉툭한 재료. 그와 맞물린 적당한 필압 덕분에 종이에는 안료 없는 부분이 필연적으로 생긴다. 안료는 그물 같은 섬유질 위에 얹히고, 그에 빛이 난반사하여 특유의 표면이 만들어진다.


7  종이는 인간의 단위. 그가 설정한 1mm 너비로 기다랗게 잘린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부는 가느다랗고 일부는 넓다. 철자를 누르는 손의 압력과 그에 따른 종이의 밀림, 고르지 않은 섬유질의 상태가 고르지 않은 간격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종이 가닥은 캔버스 프레임을 감싸지도, 힘 있게 당겨져 철심이 박혀 있지도 않다. 대신에 널찍한 나무 화판에 가지런히 등을 붙인다. 종이 가닥은 대개 화판의 가로 또는 세로 방향을 따르지만, 고르지 않게 잘린 폭과 화판에 붙으며 발생하는 차이 때문에 반드시 그에 대응하지는 않는다. 그가 그를 오류로 여길지, 특별히 마음에 담아 둔 점인지는 묻지 않았다. 종이의 일부는 떠 있다. 


8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붙여진 종이 조각 모음은 그림이라 불린다. 종이 가닥이 그림을 직조한 것 같기도, 그림이 직조된 것 같기도, 종이 가닥이 직조된 그림에서 다시 삐져나온 것 같기도 같다. 종이 가닥은 손으로 조심스레 쓸거나 손가락으로 당겨 보고 싶은, 퉁겨 보고 싶은, 미묘한 촉각적 화면을 이룬다. 


9  가지런히 정리된 물감. 물감은 섬유질 안으로 침투할 수도, 그 위에 얹힐 수도 있는 재료다. 물감을 만난 종이에는 원래의 모습을 유추하기 어려운 형상이 드러난다. 물감으로 칠해나간 부분들은 흩어졌다 모이고 다시금 흩어지며 마블링 같은 형상을 만든다. 형상은 종이가 어긋남에 따라 단절되거나 새롭게 연속되며 또 다른 형상을 이룬다. 단절되고 연속되는 형상은 커다란 화면을 이루고, 각도에 따라, 거리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그가 섞은 물감의 은은한 색은 건재로 이룬 그림의 — 흰색 부분이 남겨진 그림의 — 파스텔 톤을 닮았다. 


10  몇몇 작품은 종이 가닥의 앞 뒷면을 번갈아 가며 붙인 것이다. 그려지지 않은 종이의 반대면은 그 무엇도 묻지 않은 맨 종이, 또는 물감을 불균질하게 흡수한 섬유질을 드러낸다. 종이는 뒷모습으로 자신이 종이임을, 종이였음을 주장한다. 


11  어떤 종이는 처음의 모습, 기후에 따라 제각기 다른 간격으로 자라났을 나이테, 마구 헝클어진 섬유질이었을 때의 모양으로 자라 화판의 사각을 벗어난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잘라낸 여분의 종이다. 포장되지 않은 그는 덩그러니 바닥에 누워있다. 


12  종이 가닥이 나무틀을 가로지른다. 그에 따르면 동그란 나무틀은 수틀이다. 그가 수틀을 부러 고른 까닭은 얇은 가닥으로 그림을 직조하는 그의 습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림 연작보다 나중에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수틀 연작은 그림을 확장하여 입체화하려는 몸짓으로 보인다. 종이 가닥은 부유하는 공기에서 뽑아 올린 듯하고, 그의 말처럼 “무한히 증식하며 직조되는 판타지에서 낚아챈 하나의 실오라기” 같다. 천이라 불릴 면적이 되기 직전까지 만들어 둔 것들. 늘어선 가닥을 관통하는 하나의 가닥. 종이 가닥이 남겨 놓은 공간으로 인해 직조는 마치 진행 중인 듯 보인다. 


13  그에 따르면 그들은 책이었다. 단면에 남겨진 글자와 색색의 옆면이 눈에 들어온다. 종이는 인쇄된 글자의 성김에 따라, 오래된 정도에 따라 제각기 다른 색을 띤다. 여러 장의 종이를 묶어 만든 책. 한쪽을 열어 내부를 내보이던 책은–낱장으로 다시금 나뉘어–동그랗게 잘리고–철 기둥에 끼워져–또 다른 물성을 지닌 무엇이 되었다. 그 또한 길게 보면 가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14  포장된 상자 밖으로 튀어나온 두 개의 깃발이 보인다. 패치워크로 만든 깃발은 작은 자동차에 달렸다. 자동차는 기계 부품을 드러낸 맨몸이다. 자동차 두 대에는 각각 종이테이프에 “a hesitant person”, “A seeker of the ‹no place›”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볼펜으로 눌러쓴 손 글씨는 장난감 자동차의 분위기를 바꾼다. ‘두 대’ 보다는 다른 말을 붙이는 게 나을 듯하다. 그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 글은 뮤지엄헤드의 전시《더비 매치: 감시자와 스파이》(2023. 9. 1. ~ 23.)의 참여 필자로서 김원진 작가에 대해 쓴 글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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